하향평준화를 유도하는 연공서열 문화
열심히 일할수록 이상하게 인정(?) 받으며 불이익을 받는 직장이 있다. 바로 공무원 조직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는 없는 나의 주장이다. 하지만, 18년 동안 근무하며 보고 겪은 직접적인 경험으로 적는 이야기이니 이에 반대 의견을 가지신 분들은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세상을 보는 눈은 다양하고, 여러분이 아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주위에 공무원 지인이 있다면 그들을 이해하는데 참고만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지금부터 적는 짧은 글은, 공무원 조직 내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극히'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이다.
4년 차 7급 공무원인 철수(당연히 가명이고, 이후 등장하는 이름도 가명이다)씨는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는 데다, 성격도 모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직장 내에서 평판이 좋다.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6년 차 7급 공무원인 기태 씨는 일은 적당히 대충대충 하면서 큰 사고는 치지 않고 열심히 출퇴근만 하는 전형적인, '무사 안일주의'에 빠진 공무원이다. 어느 날, 철수 씨가 일하는 부서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떨어진다. 지역 사회 개발과 관련된 일로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려, 원활하게 마무리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부서장은 '일 잘하는' 철수 씨를 자기 방으로 불러 이야기한다.
"이번에 우리 부서가 맡은 일, 철수 씨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네. 자네가 이번 일 좀 맡아서 해줬으면 좋겠는데. 고생하는 만큼 얻는 것도 있을 거야. 이제 진급할 때 되었지? 내가 잘 챙겨주겠네."
철수 씨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버거웠지만, 거절할만한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하고 새로운 업무를 떠맡게 된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몇 달 동안, 잦은 야근도 감수하며 철수 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반면에, 이 기간 동안 기태 씨는 '역시나' 야근이란 걸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퇴근 후에는 직장 동료 또는 상사와 술자리를 겸한 저녁 식사를 하며 직원들과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몇 달 후 철수 씨가 맡은 프로젝트는 처음의 우려와 달리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 인사 발표가 있었다. 한껏 기대했던 철수 씨는(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예상하는 대로) 승진하지 못하고 기태 씨가 6급을 먼저 달게 된다. 기뻐하는 기태 씨를 보며 철수 씨는 생각한다.
'이놈의 연공서열, 이번에는 혹시나 했는데..... 믿은 내가 바보지.'
철수 씨는 이 날 이후, 업무에 의욕도 생기지 않고 열심히 일 하고 싶지 않았다.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오는 차례'에 승진할 것을 알기 때문에 남들과 같이 묻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법. 아무리 업무에 대한 열정이 식었더라도, 철수 씨는 남들보다 평균 이상의 업무 실적을 보였고 그런 철수 씨를 눈여겨보았던 기관장은 조용히 철수 씨를 부른다.
"이번에 우리 관할 지역에 사무소 생기는 거 알지? 처음 생기는 사무소라 이것저것 세팅할 일도 많고 해서 유능한 김 주무관이 가주었으면 하는데, 어떤가?"
새로 사무소가 생기는 지역은 철수 씨 집에서 출퇴근 시간에는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철수 씨는 당연히 사양을 했지만, 모든 직원이 고사한 이 자리는 돌고 돌아 결국 가장 일 잘하는(혹은 가장 만만한) 철수 씨에게 돌아왔다.
결국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철수 씨는 '순서대로 돌아온' 자기 차례에 남들과 같은 속도로 진급하였고, 인사 발령에서는 의도치 않은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런 일을 겪은 철수 씨는, 앞으로 기태 씨를 '롤 모델'로 삼고 직장 생활해야겠다고 각오한다. 이렇게 철수 씨는 다른 직원들과 같은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 되었다.
철수 씨가 겪은 일은, 성실하게 일 잘하는 공무원이라면 누구든지 맞닥트릴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공직 사회뿐 아니라 일반 사기업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공직 사회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공무원 사회라고 다 연공서열로 승진하는 건 아니다. 군계일학처럼, 정말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는 공무원은 연공서열이라는 높은 천장을 깨고 빨리 진급하기도 한다. 이런 사례가 '간혹' 발생한다고 해서, 엄연히 '자주' 발생하는 일들을 일부 사례라고 평가 절하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적은 이야기가, 내가 40대에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 중의 하나다. 공직 사회에서 '억울한 철수 씨'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내가 가장 아쉬운 건, 한때는 유능했던 그들이 점차 공직 사회에 동화되어 '하향평준화' 되어 간다는 점이다. 요즘 공무원 조기 퇴직 비율이 괜히 올라가는 게 아니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일한 만큼만 대우해 주면 된다. 억울한 철수 씨가 더는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 배경이미지 출처: needfi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