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소생하는 그 싱그러운 계절에 모든 것이 잠에서 깬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작년에 씨 뿌려놓았던 텃밭에 취나물도 파랗게 눈을 뜬다. 보는 것은 참 이쁘고 좋다. 내 새끼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으로 연결되는 날에는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눈이 뻘게 지도록 냉이를 캐고, 쑥을 뜯고 숨바꼭질하듯 새순을 찾기 바쁘다.
“에잇~ 난 그냥 안 뜯고 안 먹으련다~!” 도망치듯 그 순간을 모면하지만, 친정엄마는 한 소쿠리 봄나물을 뜯어와 나에게 내민다. 마지못한 듯 나는 큰 들통을 꺼내고 가스 불을 켠다. 소금 한 줌 넣고 데쳐진 초록이들은 뜨거운 물에 사르르 숨이 죽고 다시 새파랗게 가족의 밥상에 피어오른다.
한 고비 넘으면 여름이다.
시어머니가 보내주신 마늘을 오도카니 바라보며 까도 까도 끝이 없는 마늘 앞에서 하소연은 늘어진다.
“왜 나는 시골로 시집와서 이런 고생을 하는 걸까?”
한숨 섞인 눈물을 흘리며 물안경을 찾는다.
영화 속 고글 끼고 주방일 하는 모습은 참 낭만적이었는데,
역시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닌가 보다.
이렇게 또 한 숨 돌리고 나면 가을이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늘 통통하고 탐스럽게 살찐 밤만 골라 보내주시는 외할머니.
빨리 먹지 않으면 금방 벌레 생긴다는 재촉이 내 귓가에 자꾸 맴돌지만 난 자꾸 게을러지고 싶다.
옆집 할머니보다 한 개라도 더 주우려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했을 우리 할머니를 생각하니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바삐 움직인다.
손이 저리고 물집이 생기도록 열심히 밤을 깐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의 당부에도 이미 벌레를 만들었다.
“할머니, 죄송해요. 벌레들도 먹고살아야죠!”
나에게 최고의 무서운 계절,
드디어 겨울이 왔다.
주부로 살아오면서 가장 큰 근심 어린 표정을 갖게 되는 시간이다.
그동안은 개인전이었다면 이번엔 팀플레이다. 큰 이모네, 작은 이모네, 삼촌네 식구들 모두 모여 수백 포기의 배추 앞에서 알아서 척척, 호흡을 맞춘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파는 순간은 리듬이 깨지기 마련, 서로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암묵적인 룰을 모두가 조용히 지키고 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우리는 1년 치의 묵은 수다에 울다 웃다를 반복하며 손놀림은 쉬지 않고 각자의 몫을 치뤄내기 바쁘다.
나는 주부 말단 사원.
노련한 주부님들 보조 맞추느냐 정신없이 눈치 보며 발만 이리 동동 저리 동동 구른다. 눈치껏 알아서 믹스커피 한 봉씩 뜨끈하게 대접해야 되고, 가끔씩 어른들의 수다에 오버액션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여전히 12년 차 새내기 주부다.
아~~ 언제쯤 나는 김장 대열에 끼어 속만을 버무리며 맘 편히 수다 떨 수 있는 날이 올까?
나의 졸병은 언제쯤 나타나 커피 심부름을 시킬 수 있을까?
일 년의 숙제들로 가득 채워진 냉장고 속 나의 보물들을 그윽하게 쳐다보며, 드디어 맞은 주부의 해방감에 잠시 쉼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