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목욕탕을 사랑합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사로잡은 것

by 햇살정아

어린 시절 나는 '동네 목욕탕'을 사랑했다.

엄마와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그곳, 아프게 때를 미는 것은 싫었지만 유일하게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곳이라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에게는 두 살 차이 쌍둥이 남동생들이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꼭 정확히 나눠야 싸우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삼등분이었다. 엄마의 사랑과 관심도 삼등분! 어쩌다 아픈 날이면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았다.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으니깐. 자주 아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네의 오래되고 작은 목욕탕, 익숙한 그곳으로 엄마 손 붙잡고 쫄래쫄래 따라 들어간다.



"오늘도 아주머니들은 출근 도장 잘 찍으셨네요. 삼삼오오 한증막에 자리 잡은 낯익은 아주머니는 벌써 명당자리 잡고 어제는 뭘 먹고 오늘은 무엇을 먹을 것인지 수다삼매경이네요. 역시 먹는 이야기는 벌거벗고 하는 게 제맛이죠?


앗, 사우나에서 목숨 걸지 마세요. '누가 누가 잘하나' 시합이라도 하듯 모래시계랑 눈싸움은 건강에 해로워요!


분홍색 부황을 어깨와 등에 붙이고 안킬로사우루스처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아줌마, 오래간만이어요. 오늘따라 핑크뿔이 더 탐스럽네요.



저기 핑크 방수비닐천을 칭칭 두른 사람들이 오늘따라 많아 보이네요? 여름휴가동안 다들 과식하셨나 보군요!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얼음이 가득 채워진 통을 벌컥벌컥 마시고 계시는 아주머니. 전 늘 그 안이 궁금했어요. 어떤 음료수를 담아두셨을까? 홍초일 것 같기도 하고 박카스가 들어갔을 것 같기도 하고... 저도 너무 먹고 싶어요.


오늘도 매점에서 파는 설탕 듬뿍 넣은 얼음커피를 엄마 몰래 홀짝이며 흐뭇해하는 저도 보이네요. 이건 왜 이리 맛있는 것일까요? 몰래 마셔서 더 그런 것일까요?


처음 보는 사람도 오래된 친구로 만들어 주는 나무평상 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벌러덩 누워계시는 분, 좀 일어나 주세요! 잠은 안방에서 주무시 길요! 지금 우린 막장드라마의 남주인공 욕해야 한다고요. 왜 여기에서 보는 드라마가 집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재밌을까요?


공동체의 힘은 참 위대합니다~암요~! 이런 것이 목욕탕 오는 재미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자그마한 동굴 같은 곳에서 아줌마들의 역사는 만들어졌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민낯 그대로 솔직한 모습을 나눌 수 있는 그곳, 묵은 때는 버리고 상쾌하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그곳. 정을 나누는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보너스처럼 펼쳐지는 신기한 광경 덕분에 엄마와의 목욕탕 데이트를 늘 기다렸다. 엄마도 일상의 노곤함과 피로를 풀기 딱 좋은 그곳에서 세 명이 아닌 한 명만 보살펴도 괜찮은 안정된 그곳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탕은 어떤 말도 술술술 나오게 만드는 신비한 장소이다. 뜨끈한 탕 안에서 몸을 녹이면 마음도 함께 사르르 녹는 것 같다. 긴장되고 힘들었던 순간들, 속상했던 모든 것들이 내 땀과 모두 배출되는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다 나아지고 괜찮아진다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곳, 엄마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그곳을 나는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


이젠 둘이 아닌 셋이 함께 간다. 나의 귀여운 꼬맹이 딸도 함께. 엄마가 나에게 그랬듯, 아이의 수다를 즐겁게 들으며 장단 맞춘다. 엄마의 오버스러운 리액션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이의 눈빛을 읽는다. 불에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구부러지는 아이의 등짝을 찰싹 때려가며 묵은 때도 밀어주는 나는 어느새 찐 아줌마가 되었다.


아이도 어른이 되면 할머니와 엄마와 함께 다녔던 목욕탕을 추억하겠지?

그곳에서의 느꼈던 다정한 온기를 아이도 기억해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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