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by 햇살정아

정말 오래간만에 소설에 푹 빠져 지냈던 일주일이었다.


최은영 소설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여러 번 읽었다.


처음엔 눈에 보이는 데로 문자를 읽고,

그다음에는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며,

또 그다음에는 좋은 문장들을 필사하며 다시 읽었다.

그리고 또다시 읽고 또 읽으며 그제야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소설은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사람 덕분에 치유되는 너와 나, 우리의 사는 이야기다. 우리는 공포와 분노를 마주하는 일을 어려워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특히 슬프고 괴로운 감정은 나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나의 민낯을 내보이는 것조차도 타인에게 흉이 되는 일이라고 '쉬, 쉬' 하며 산다.


나를 포장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치우쳐 억지로 웃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슬픔을 외면하고 살아온 건 아닌지 뒤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 책은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다.

주로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현실, 직접적인 주변 상황 이야기다. 특히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성들의 처지를 이야기하되 과장되거나 복수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복기하며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시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이겨내는, 이겨낼 수밖에 없는, 이겨내야만 하는 이런 마음들이 어쩜 한 줄기 "아주 희미한 빛"이 아닐까? 이 빛들은 우리 삶에 '희망'이란 이름으로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란 의미는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나에게 희미한 빛은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앞서 나가는 '나의 멘토'이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따라가 봐야지, 배우고 실천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고 주저하는 나의 행동에 용기가 생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몫>, <일 년>의 세 개의 단편은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한 이야기가 도드라지게 그려진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현실, 비정규직은 다수가 어린 여자들, 간부 다수가 남자들이란 사회불합리적인 현상에 대한 여성 차별에 대한 이야기다.

<답신>,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네 단편은 사랑에 기반한 돌봄에 관한 행위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몫>에서 "마음이, 당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붙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그때 알았다"(p.66)라고 말하는 해진이처럼, 나 역시도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비정규직의 시간강사가 되었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 남의 집 식모살이로 팔려가고 가족에게 두 번 버림받은 기남이, 언니에게 버림받은 줄 알았는데 결국 언니 덕분에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던 시간, 남편을 죽여야만 아내가 살 수 있는 사회구조의 잔인함 속에서 버티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살았다.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고, 살아보지 못한 여성'으로 시선을 따라갔다.


이전에 드라마나 뉴스에 잠깐씩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고 들으며... '어떡해, 안 됐다. 불쌍하다.' 이렇게 한마디 '띡' 던지고 금세 잊었다. 나는 어쩜 타인의 상처에 깊이 공감하는 척, 그들을 가엽게 여기고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위로를 보낸다고 오만하며 살아온 것이다.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어쩜 나 역시도 불합리한 편협한 사회의 부조리에 당연한 듯이 길들여져 살아왔음을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그들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도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전과 후로 나의 마음가짐은 조금은 달라졌다. 한 발짝 조금은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적어본다.



이 책의 또 다른 관점 포인트이자 내가 좋아한 이유는 바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 내가 글쓰기에 대한 사랑과 고민하는 부분, 글쓰기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 이 모든 글귀가 나를 위로한다. 덕분에 남을 의식하며 쓰던 안전한 글쓰기에서 당당하게 내 의견을 펼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한 줌 얻게 되었다.


#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p.11)

#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덜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그러지 않았던 내 비겁함을 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31)

# 내가 그 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 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 (p.31)

#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 일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p.32)

# 사람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느라 자기 목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내게 넌지시 말했다. (p.35)

_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p.52)

#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는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글쓰기에 매달렸다. 문장과 문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를, 모든 단락이 제 역할을 다하기를,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기를 당신은 바랐다. (p.58)

#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p.59)

#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쓰는 마음, 마음을 다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당신 몸을 휘감고 아프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p.65)

# 덩어리 같은 막연한 생각을 언어로 풀어낼 때, 어렴풋하게 떠오른 문장들을 당신의 목소리로 종이 위에 적어나갈 때, 당신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골똘히 한 생각을 써 내려간 글 속에서 당신은 당신 나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p.75)

# 그토록 나약해 보이는 당신 안에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글로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당신도,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p.75)

#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p.75)

#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p.75)

#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p.79)

_몫

# 기록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거든. (p.127)

#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나를 수습할 수 없을 때 나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노트에 적은 후에 바로 찢어서 없애버렸어. 글은 글일 분이라고,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어떤 글을 남기기로 선택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바람을 담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마음은 실제로 전해지지. 상대가 그 글을 읽든, 읽지 않든 말이야. (p.172)

_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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