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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경 Jul 15. 2020

이기적 위로

26살 겨울, 남의 짝사랑에 과몰입

잘못 썼다 지우지 마라     

애써 지우려 하지 마라


길쭉하던 샛노란 연필

몽땅연필이 다 되었는데     

조각 지우게 하나 쥐고

지워진다 지우려 하지 마라


그것이 어디 그런다고

티 없이 지워질까     


조각 지우게 닳고 닳아

네 고 손이 상처 날까 두렵다




삐걱대는 책상 신음 속에서 몽땅연필 하나가 새까만 구석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녀의 눈망울은 붉게 차올라 있었다. 한 손은 일기장을 짓누르고 다른 한 손은 지우게를 짓이기고 있다. 지우게는 그녀의 손마디 하나보다 더 작고 볼품없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작은 것을 어찌나 힘을 주어 쥐었는지 손끝에 핏기 없이 창백했다. 가슴팍까지 붉게 상기된 살빛과는 대조를 이뤘다. 그녀는 종이가 찢어질세라 노트를 단단히 붙잡으면서도, 책상을 덜컹거리며 있는 힘껏 글씨를 지운다. 하지만 일기장에 빼곡한 글씨는 그녀의 애처론 바람과 다르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만해'

그녀의 귓가에 간절히 속삭여 본다. 하지만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 손을 내밀어 맺힌 눈물을 닦아본들 겨우 일렁일 뿐 후두둑 떨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화가 났다. 그녀의 슬픔에 너무나 화가 났다.


라며 남의 짝사랑에 과몰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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