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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 Jul 27. 2021

묻는다

왜?


아이들은 ‘왜?’라는 수많은 질문을 하며 성장해간다. 아이들은 질문은 평상시 생각해 보지 않고 당연시했던 것들이라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어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어서 무어라 설명하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다시 생각해 보기에는 세상사가 바쁜 어른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들이 귀찮아 때때로 어른들은 대답을 회피한다. 크면 알게 된다며 지금 당장 이해할 능력이 안 되는 것처럼 아이의 호기심을 외면한다. 그렇게 답을 얻지 못한 채 성장한 아이들은 길들여진 그 어른이 된다. 그렇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아니 철저하게 받아들인다. 혹시나 못 받아들일까 봐 불안하며 사방 눈치를 보기까지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태초부터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존재한다. 그렇듯이 그것들도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만들었을 때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태초부터 영원히 존재한 것이 아니라 생성된 것이고 사라질 수도 있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기존 세력들은 대대로 있어왔었던 것이라며 영원불변한 철칙이라도 되는 양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이렇게 편리하고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일률적으로 받아들이기 교육을 시킨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학교이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의 아이에게 어른들이 무언가를 채워주는 것이다. 그렇게 채워진 것들이 아이에게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을까. 모두들 같은 교육을 받고 거의 좋다 하는 같은 것들로 채워진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는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선별된 좋은 것들로만 채워진 교육을 받는 것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가장 유용한 도구로 인정되고 환영받는다. 그렇게 당연한 것으로 교육받고 길들여진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온다. 비슷한 최고의 교육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똑똑한 로봇들의 모임 같다. 각자의 개성이 없이 무난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은 과연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일까. 기존 사회가 세뇌시킨 로봇 인간일까.     


그러다 간혹 사회에서 요구하는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자가 나타나면 갖가지 병명을 붙여 도태시키고자 한다. 사회에서는 그 다름이 같음을 자극하여 분열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요소로 인지되기 때문이다. 일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것처럼 사람도 훈련되고 길들여져 사회의 일원으로써 벗어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이렇게 길들여지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자는 사회성이 부족한 자로 격리되거나 아웃된다.     


살맛이 없다고 어른들은 수시로 한탄한다. 왜 그러는 것일까. 밥맛도 없다 한다. 왜 일까. 삶의 의욕이 사라져서이다.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다 보니 새로운 것이 없고 매번 같은 길을 가다 보니 눈을 뜨고 있긴 한데 보여주는 대로 모두들 똑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귀가 있는데도 자신의 귀로 듣지 못하고 들려주는 같은 것만 듣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욕으로 살아가니 활력이 없고 맛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사회가 부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기억하고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수밖에 없다. 자유라는 것을 주어도 사용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은 자유로운 이성적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냥 안전하게 규칙을 잘 지키는 로봇이나 다름없다. 당연한 것은 없다. 이미 닦여진 길만이 길이라는 당연지사는 없다. 그저 일상사에서 ‘왜’라고 묻게 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훈육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닦아 놓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불안하긴 하나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이다. 이런 기회와 선택이 삶이며 자유이다.     


힘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할 이성이 있는 한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이성적인 존재이며 로봇이 아닌 사람일 수가 있다. 문명화된 사회는 어쩌면 커다란 교도소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죄지은 자는 아니지만 사회를 위험에 빠트릴 요인이 있는 미래의 죄수를 방지하기 위한 길들이기의 교화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품어도 되지 않을까. 왜라고 묻고 있다면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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