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하다
네가 나를 올려본다.
내가 너를 마주 본다.
네가 눈을 깜박인다.
나도 천천히 눈을 깜박여준다.
네가 내 옆에 다가와 내 팔을 앞발로 꾹꾹거린다.
내가 덮고 있던 담요를 들어 올려 너를 들여보낸다.
담요 안에서 내 다리에 밀착하여 네가 엎드려 잔다.
골골거리며 한참을 자던 네가 나의 작은 기척에 살며시 나온다.
밖으로 나온 너는 엎드려 머리만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손을 들어 너의 뒤통수와 등과 엉덩이를 쓰담쓰담해준다.
골골거리며 너는 느슨하게 몸을 펼치고 눈을 감는다.
특별한 말은 없어도 너와 나는 이 방 안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다.
너는 골골거리고 나는 한국어로 말한다.
너와 나는 언어가 다르고 모습도 다르고 종도 다르다.
어떤 때는 너의 요구에 응하고
어떤 때는 잔소리를 해대고
어떤 때는 서로 어울려 킁킁 골골 거리며 늘어져 있다.
간혹 귀찮아 모른 척 누워버리면 너는 집안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위를 한다.
고음으로 시위하는 네 소리에 할 수 없이 네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이렇게 너와 나는 서로에게 자신의 뜻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전달한다.
여기가 너와 나의 아고라가 아닐까.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아고라는 토론의 장이다
그다음은 상품을 살고 파는 상인들의 장이 되었다
아고라는 소통의 장인 것이다
그 당시 어떠한 부패와 폭력이 난무했을지는 모르지만 소통의 장이라는 의미만은 전해지고 있다.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고 모습이 다를지라도 그 다름으로 인해 토론이 가능한 것이다.
다름은 서로의 존재를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서로를 향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소소한 부작용 때문에 소통이라는 것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어 시위를 한다.
이것은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지 폭력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과격함만 보고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생각을 들어야 한다.
감정만 앞세우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들어주고 말해야 한다.
소통이 잘 되도록 다양한 방향이 필요하다.
어쨌든 시위는 현대의 아고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