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다
며칠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간단한 카톡이나 하고 댓글을 달고 유튜브를 보고 있다.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다.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는다.
집안에 혼자 있다.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느낌이다.
미래를 위해 하는 것이 없다.
현재 배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잔다.
씻지도 않는다. 양치질만 겨우 하고 있다.
어디까지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계획이나 채근이 없으니 머릿속은 텅 비어 있다.
세상과 단절되었다.
반미 포크 잘하는 식당에 왕복 1시간 넘게 걸어서 포장해 왔다.
두고 먹으려고 2인분을 포장했다.
나눠 먹으려 했는데 어찌나 입맛이 돌던지 앉은자리에서 1인분을 먹어치웠다.
그것도 맥주 큰 것 1캔을 곁들여 먹었다.
군고구마 만들어 먹고 작은 방울토마토도 먹고 생당근도 씹어 먹고 계속 먹었다.
평소에는 조금만 많이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강제로 소식가가 되었다.
요 며칠은 끄떡없이 이것저것 들어가도 소화가 된다.
걱정이나 불안이나 회의가 없으니 걸릴 게 없나 보다.
그 많은 것들이 어디로 다 들어가는지 놀랄 지경이다.
소화제에 의지 않고 소화가 되니 걱정 없이 먹고 또 먹고 싶어 지니 먹는다.
소화불량이 며칠씩 지속되면 몸무게가 빠지고 보기 좋게 날씬해지는 것이 아니라 근육이 날아가 늘어진 가죽만 보인다.
근육은 아닐지라도 살이라도 붙어있어야지 너무 늙어 보이는 게 싫어서 열심히 먹어야지 했는데 진짜 이렇게 잘 먹을 줄 몰랐다.
잘 먹고 살 찌워야지 생각하니 그대로 되는 그것도 빠르게 실행되는 게 신기하다.
아니 다른 것들은 원해도 제때 되지 않아 진을 빼더니만 살 찌우는 것은 이렇게 빨리 진행되니 어이가 없다. 마음을 어떻게 먹어야 이리 쉬이 실행될까 궁금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원하는 것은 마음속에 간직해야 되겠다 싶다.
그래야 언젠가는 해낼 것이 아닌가.
앞으로 며칠만 더 이렇게 맹탕으로 놀고먹다가 원하는 마음을 되찾아야겠다.
요 며칠 동안 계획을 깡그리 무시하고 죄책감도 무시하고 세상의 생존경쟁에서 벗어났다.
그동안 사라지지 않던 불안이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 없으니 시스템이 멈춰버린 컴퓨터 같다.
컴퓨터가 고장이 났으니 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쉬고 있다.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하면 번아웃이 될 것 같아 본능적으로 머릿속이 동작을 멈추라 한 것 같다.
생각이 아니라 본능을 따르니 이제야 노예가 아닌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까지는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갈구고 우울해했는데 그 늪에서 벗어난 것이다.
죄의식 없이 쉬자.
자유롭게 편하게 놀자.
노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을.
놀 수 있을 때 놀자.
노는 게 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