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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시간

자신을 기다리다

by 오순

창가에 오도가니 앉아 있는 고양이를 보면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념무상인지 모르겠으나 그 속이 궁금하다.


가끔 가만히 앉아 있거나 걷고 있을 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어 하고 답하면 에이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던데 뭐야? 하고 재차 질문을 받게 된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야만 되는 것인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내가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나 하고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글쎄 생각이 안 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생각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고양이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를 작정하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무심히 생각이 혼자 흐르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든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고 믿기에 의식이 되든 아니 되든 아무 생각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쩐지 거짓말같이 느껴진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가 생각일까.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일까. 의식되어 판단까지 이르면 자신의 생각이라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들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어디에서 들었다든가 누가 그러다더라 하는 인용부호를 붙이게 된다.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이 곁들여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 생각은 그냥 지식처럼 쌓아두거나 흘려보내버린다. 자신이 곱씹어 봐서 괜찮거나 보태거나 하면서 판단을 곁들이면 자신의 생각이 되고 가치관이 되고 재산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는 것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일까.

홍수 같은 정보 속에서 어느 순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걸려든 것이 자신의 것으로 둔갑한 것은 아닐까.


분명 자신이 혼자서 흥얼대다 지은 시가 어딘가 익숙하다. 혼자서 보게 되면 별문제가 없지만 공모전에라도 내걸면 도용이 될 수도 있기에 부리나케 검색을 해본다. 정보의 영향을 받고 정보에 영향을 주면서 사는 정보 시대에 순수한 창작이라든가 순수한 자기만의 생각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창작과 모방의 차이는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그림을 그린다. 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렇게 다 다르다.


그러나 정보가 곁들여지거나 상업적 직업적 전문적 그림을 그리게 되면 수렴되는 과정에서 모방이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가미되게 된다. 그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가 창작과 모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하게 자신만의 생각이라는 것은 없다.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수정하고 가미하고 버리는 선택 과정에서 자기의 생각으로 만들어진다.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과 이성이 융합되어 자연스럽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생각은 달라진다.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본래 있어 온 말을 적절하게 표현해 내었기에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된 것이고 말이 된 것이다.


정보를 재산처럼 수없이 쌓아놓는 것은 머리만 무거워질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들어온 정보를 곱씹고 정리를 해서 적절하게 유용할 줄 알아야 자신만의 생각이 되고 지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도 자신만의 생각으로 되짚어지지 않으면 무가치한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주입된 것이 아닐 때 생각이 되는 것이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이 지옥의 문 앞에 있다는 것을 처음 로댕전에서 보고 놀라움과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앞에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관람객들이 그 조각상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관람할 정도였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하나만 주입되어 있던 내게 갑자기 아무 지옥의 문 조각상 전체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주입된 것이 다가 아니었다는 것에 배신감과 신뢰의 지축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그 배신감은 그 이후부터 주입에서 되새김과 확인의 과정을 선물해 주었다.

확고함은 없다.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글을 쓰듯 퇴고의 과정이 생각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열심히 달리다가 멈춰 서서 뒤처진 자신의 영혼을 기다린다는 인디언의 말처럼 수많은 정보들을 되새길 시간을 주어야 한다.


무조건 달린다고 능력이 빨라지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따라오지 못한 빨리 가기는 빈 껍데기일 뿐이다.

자신을 기다릴 줄 알아야 자신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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