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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감옥

정체성

by 오순

언젠가부터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처음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그 편안함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꽤나 오래전부터 집안에서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있다.


어느 날 욕실 거울 앞에서 축 늘어진 가슴을 보았다.

가슴도 늙는구나. 처져도 너무 처져 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큰 유방이라 더 늘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이 낳고 유두가 좋지 않아 모유 수유를 하지 못했다. 그리 쓸모 있는 가슴도 아닌데 평생을 달고 살려니 귀찮기 그지없다. 남보기에 성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두를 감추어야 하고 크기가 있으니 출렁이지 않게 브래지어를 해야만 했다.


브래지어를 하면 더 크게 보이는 것이 더 신경 쓰인다. 남들 눈에 띄는 가슴이 싫다. 남들의 시선 자체가 싫은 것이다. 그냥 가슴인데 성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싫다.


어떤 사람은 유방이 작아 고민이고 키우는 수술까지 한다는데 그녀는 그 무게가 싫다. 그것만 없으면 달릴 때도 편하고 몸도 가벼울 텐데 하는 생각뿐이다.


구경거리가 되는 가슴이 싫다. 동물원에 동물도 아니고 스쳐가는 눈길들이 그녀를 왜곡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보는 것이다. 그녀는 가슴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여성이라는 가슴이 그녀의 갈 길을 정해버리고 한계 지어버린 것 같다.


젖가슴이 없었던 어릴 적에는 자유로웠다. 가슴이 생기고 생리를 하면서 여성이라는 육체가 형성되면서 그녀의 자유는 사라졌다. 남들의 성적 만족도의 눈요깃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감추고 없다고 가리고만 싶은 육체를 가진 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불편이 평생을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생리가 끝났을 때, 폐경이 되었을 때 그녀는 자유를 외쳤다.

매번 한 달에 한 번 거의 일주일을 생리로 모든 신경과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자신으로 있지 못하는 것이 감옥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영화 속에서 커다란 육체의 여자가 당당히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는 놀랐다. 영화 속 여자는 누가 자신을 성적으로 바라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몸의 존재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영화 속 여자의 그 당당함이 그녀의 왜곡된 마음을 드러나게 해 주었다. 그녀는 그녀의 가슴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성적인 도구가 되는 것이 싫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여성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정체성을 그녀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의 곡선이 옷 위로 드러나도 이젠 엉덩이 선만큼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간혹 가다 노브라를 보면 신경이 쓰이곤 했다.

노인들의 노브라는 귀차니즘과 불편함 때문이지만 젊은 사람의 노브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당당함이 곁들여져 보인다.

이젠 노브라의 그 불편한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


수영복을 입을 때 남자들은 성기가 돌출되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상체의 젖꼭지는 아예 드러내놓고 있다. 여자들은 유두가 수영복 위로 돌출되는 게 신경 쓰여 수영복 속에 가슴 가리개를 집어넣는다. 수영하다 보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여자들 자신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유두 형태가 드러나면 어떻다는 것인가. 아무도 성적으로 보지 않는다.

간혹 성적으로 보게 되면 그 시선은 변태이고 유죄이다.

그동안 성적인 시선에 길들여진 여성들의 마음이 아직도 그 시선에 자유롭지 못해서 신경 쓰는 것일 뿐이다.


노브라에서 자유로워지니 옷차림새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알지 못하는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되니 자신의 자유가 돌아온다.

여성이지만 성적으로 제한되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니 비로소 세상 속에 살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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