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자투리 공간에 야채를 기르고 있는 지인이 혼자 먹기에는 좀 많다며 상추를 나누어주었다. 다듬고 남은 것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버렸는데 그 속에서 달팽이 두 마리가 기어 나왔다. 생명이 안쓰러워 투명 통에 상추와 함께 넣어 놓았다.
밤사이 두 놈이 아주 생생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달이와 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이 부여되고 지칭하는 순간 인연의 끈이 팽팽이 이어진 느낌이다. 그 녀석들과의 삶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수시로 들여다보며 싱싱한 야채들을 교체해 준다. 그중에 팽이라 한 한 놈이 더 크고 활발하다.
같이 태어난 것인지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것인지 우연히 만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똑같은 달팽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서로 다르다. 요놈들도 암수가 따로 있을까. 검색해 보니 자웅동체라 한다. 알을 낳아서 번식하는데 자웅동체이지만 유전형질이 나빠지기 때문에 혼자서 번식하지 않는다 한다.
엄청 느림보라는데 그 통 안에서는 느림이라는 속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공간이 그 녀석들과 딱 맞춤이라 그런지 작아 보이지도 앉는다. 뻗을 자리에서 다리를 뻗어야 생존할 수 있나 보다. 비록 처음엔 쓰레기 행으로 버림받았지만 너그러운 주인을 만나 회생한 두 녀석들의 삶이 신통방통이다.
며칠을 살아낼지 알 수는 없지만 사는 데까지 보살펴 주리라. 화분에 물을 주듯 야채를 갈아주고 습도를 조절해 주며 하루의 시작을 이 녀석들과 함께 한다. 이제까지와 무언가 다른 하루들이다. 두 녀석들과의 공동생활은 작은 변화이지만 활력소가 되고 있다.
녀석들도 알까. 자신들의 역할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까. 보살펴주는 이에게도 그들이 무언가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받아들이든 말든 받는 사람 맘이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삶에 집중해 있어서 남의 삶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집중하다 보면 살게 되어있는 것이 삶이 아닐까 싶다. 죽으려고 태어난 생명은 없지 않은가. 살다 보니 죽을 때 죽는 것 일뿐 우리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삶을 포기한 것이지. 작은 일이지만 소소한 변화가 찾아드니 그만그만하던 무료한 시간들이 습기를 머금은 풀들처럼 촉촉해진다.
큰 변화를 원한 것이 아니었구나. 무료하다 싶으면 작은 변화로도 충분히 충족이 되는 거였구나. 심심하면 돈을 들여 여행을 기획하거나 친구와 약속을 잡고 차를 마시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수다를 한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다. 이 두 녀석들과의 만남과 인연은 뭔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원하는 것 없어도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서로에게 주고받는 게 있다. 그것이 좋다.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만남과 기획한 만남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부담이 없다는 것이 첫째가 아닐까 싶다. 받아도 주어도 부담이 없고 각자에게 삶과 기쁨을 주는 공존이다.
어쩌면 사람 사이도 같은 공존이 가능한데 생각이 욕망과 의심과 불안을 불러들여 불편한 공존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흐르는 대로 하면 될 것을 혹여나 민폐를 준 것은 아닐까 혼자서 설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신에 대한 불안이 커져 확인하고 싶고 지나친 결벽증이 상대에 대한 획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만남까지는 좋았는데 되새김질이 안 좋아지는 경우이다. 그냥 그렇게 놔두면 될 것을 지나치게 사회인으로 길들여져 인정욕구의 불안심리가 발동하여 병증이 되는 것이다.
달이와 팽이처럼 그냥 먹고 싶으면 먹고 움직이고 싶으면 활동하면 된다. 그들을 보는 기쁨이 그것이지 달이와 팽이가 머리를 흔들며 촉각을 세워 반기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두 달팽이가 머리를 흔들며 달려들면 아마 기겁할 것이다. 달팽이가 달린다는 게 가능할까. 달팽이에겐 가능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눈에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혹여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달리는 게 보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을 자유롭게 해 주었을까 아니면 무거운 족쇄를 채운 것일까. 생각하는 동물로 최고의 이성을 자칭하는 근대인으로 시작하여 현대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에 치여서 넘쳐나는 정보에 짓눌려 생각할 여유도 없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엉뚱한 생각들로 선택의 길 막힘이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을 포기하게 될 때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선택이 쉬워질 때가 많다. 우리는 과연 정보의 홍수 속에 떠밀려 내려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 홍수 속에 대책을 세워 홍수의 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달팽이도 생각을 할까.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들만의 생각들이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달이와 팽이가 밤새 무사한지 살펴보며 그들과 만남으로 시작하는 하루이다. 우리가 잘 때 그들은 무엇을 할까. 그들도 자는 것일까. 아니면 야행성으로 밤새 무슨 일인가를 하는 것일까. 먹고 싸놓은 것을 보면 잠만 자는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시간과 같을까.
우리와 상관없는 시간으로 그들의 삶은 이어지는 것일까. 우리들의 시간에 전혀 영향을 받지 그들은 무슨 시간을 사용할까. 주기라는 패턴이 있으면 시간이란 명칭을 쓰지 않아도 시간처럼 쓰이는 삶이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궁금하다. 인간과 다른 그들의 삶이 어떤지 그들은 어떤 대화를 어떻게 나누는지 궁금하다. 그들도 우리들의 생활이 궁금할까.
우연히 달이와 팽이와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언제 끝날지는 미지수이다. 아마도 그미지수를 생각하는 것은 나만 일 것 같다. 그들은 그냥 그들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그들의 시간이 우리들의 시간보다 빠르게 가기 때문에 지켜보고 염려하는 감정들은 다 나만의 것이리라. 그래도 시작된 인연이기에 마음대로 없애지는 못한다.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네 삶도 어찌 보면 그렇게 흐르는 대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주적으로 볼 때 우리들의 시간도 엄청 짧고 빠르게 흐른다. 멈출 수도 없고 아니 갈 수도 없는 삶의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순간순간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거리들로 생각들로 무겁게 족쇄찬 죄수처럼 끌려 다니지 말고 단순하고 맑게 자유롭게 가볍게 살아보자. 그것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 싶다.
정의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지 않은 삶을 그려내는 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다. 오늘은 숨을 자유롭게 토해내자. 숨쉬기도 배워야 되는 어른이 되어 늙어가지 말자. 자연스럽게 자신을 느끼면 숨은 쉬어진다. 배워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 배운 숨은 억지다. 자신의 숨이 아니다. 자신만의 숨은 자신이 있음을 느껴야만 쉬어진다. 배울 필요 없는 숨쉬기부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