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증
몇 달 동안 소화불량이 반복적으로 발생해 불안한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침 국가건강검진 대상자라 건강검진을 했다. 그렇게 결과를 기다리면서도 가스, 트림, 거북함 등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아까운 근육손실성이 의심되는 체중감량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쭙잖게 아는 지식으로 불안과 의혹만 키우며 인터넷 검색을 하고 또 하고 있었다.
마침내 건강검진표가 이상 없음 정상이라고 날아왔다. 그제야 큰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가족력에 위암이 있어서 항상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일인이다. 건강에 대한 유튜브도 들여다보고 운동에 대한 유튜브도 보며 이래저래 지지부진하고 있는 중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가스가 차든 말든 힘차게 운동을 하고 먹는 양은 좀 더 줄여서 먹었다.
뭔가 위암이라는 두려움에 이끌려 생활이 소심하게 병증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노화로 인한 소화력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일단 정상이라고 했으니 활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하루가 달라지는 기분이다. 갑자기 안개처럼 위장을 휩쓸고 있던 가스가 가라앉더니 조금 편안해졌다.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더 적어진 지금 이렇게 그냥 그대로 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나만의 것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 그렇게 목표를 만들고 루틴을 만들어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데 의욕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열정은 어디 가서 길을 잃은 것인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서 고군분투해 보았지만 자신에 대한 절망만이 돌덩이처럼 짓눌려오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갈굼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내 몸이 드디어 가장 허약한 위장에서부터 반란을 도모했다. 그렇게 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몸을 무시하고 계속 난타를 하고 있는 내가 내 소화불량의 주범이었다.
검사를 했는데 이상 없는데도 소화불량은 계속되고 있으니 원인을 찾아내야만 했다. 가까운 어린이도서관 북카페에 와서 책을 보려고 왔는데 책도 읽히지 않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이리저리 인터넷으로 아무 뉴스나 보면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노닥거리다 보니 머릿속이 텅텅 비어있음이 느껴졌다.
아무리 박박 긁어대도 떨어진 양식이 솟아날 리 없는 항아리처럼 나는 텅 빈 머릿속을 긁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만 내버려 두자. 오늘만 아무것도 하지 말자. 갈굼 질도 하지 말자. 하루 논다고 하루 아무것 안 한다고 죽지 않는다. 이런 마음을 먹으니 내가 언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성과 없이 놀아본 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글퍼졌다. 너무 오래되어 그게 언제인가 싶어졌다.
북카페에 설치된 수유실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가 있었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백일이나 지났을까 싶지 않다.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아기는 둘째이고 네댓 살 먹은 큰애가 같이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수유하는 중에 기다리지 못해 배고프다고 칭얼거린다. 엄마는 아기 수유하고 밥 먹으러 가자고 달랜다.
말을 하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갓난아이의 배고픔이 우선인 것이 사실이긴 하다. 큰아이는 엄마의 말을 듣고 이해는 했지만 감당하기가 힘든 듯 실내를 서성이고 아래층에도 가보고 다시 올라와 칭얼대고 있다. 아마도 배고픔보다는 심심한 것이 더 큰 것 같다. 그 아이와 놀아주면 엄청 좋아하겠구나 싶었다.
주책이라는 생각에 자제를 했지만 갑자기 내가 놀고 싶어 졌고 진짜 놀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전 어린 시절처럼 놀지는 못하겠지만 오늘은 그냥 나를 내버려 둬 보자 하는 보상심리가 작동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위장 가득 차 있던 안개 같은 가스가 빠져나가 위가 편안해졌다.
성과주의와 나의 성급함이 나를 갈구고 있어 위가 스트레스로 장애를 일으켰던 것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범인은 나였다. 그래도 오늘 나를 알게 되어 감사한 날이다. 모르는 그 아이의 심심함이 공감되면서 나를 풀어주게 된 것이다.
오늘은 노닥거리자 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편안해진다. 여기서 더 욕심부리면서 더 편안해지고 싶어 집에 가서 드러눕기라도 하면 역효과가 날 것 같다. 그냥 여기 그대로 앉아서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노닥거리기이고 진정한 휴식이 되고 있다.
오래간만에 노닥거리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어떤 시도보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휴식이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뭔가를 시도해 보고 싶어진다. 이번 시도는 내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한 것이라 스트레스는 없다. 시도는 같더라도 의미는 달랐다. 강요가 아닌 자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