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공포와 친밀도

꾸준히 하기

by 오순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귀찮은 데 수영을 하루 쉴까 망설이고 있는데 제시간에 눈이 떠진다. 일찍 일어나 노닥거리는 것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일어나니 몸이 뻐근하고 통증이 있다. 더 좋아질지 더 나빠질지 시험 삼아 수영을 하러 갔다. 수영을 하고 나니 역시 더 좋다. 적당한 통증에는 운동이 치료제이지 싶다.


오히려 뻐근하던 몸이 풀린 듯 편해지니 수영하러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어제보다 평영이 조금 나아져 더 만족스러웠다. 평영으로 두 바퀴나 10분 내에 돌았다. 자기 수영 방해받는다고 인상 쓰던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또 왔다며 제자리에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누가 물어보았나.


같은 중급레인에서 수영하는 달덩이 할머니는 평영 하는 나를 보고 끝까지 왔으면 잘하는 것이라며 웃어주던데...... 그 아저씨는 초짜라 아직 자유형 연습 중이다. 배영도 못하면서 샘은 많아가지고 속으로 비웃으며 겉으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뭐 어쩌라는 거냐고? 못하니까 연습 중 아니가. 남에게 방해되지 않으려고 초급레인에서 하잖아. 방해되면 중급레인에 가라고 했잖아. 못하는 사람이 초급레인에서 하는 게 맞다면서. 할 말이 없으니 하던 데서 해야지라고 중얼거리던 아저씨는 여전히 초급레인을 고수하려 한다. 어쩔 수 없을 때만 중급레인으로 간다.


어차피 나중에 중급레인으로 가서 해야 되니 사람 없을 때 거기 가서 익히면 좋으련만. 그렇게 변화에 대해 적응이 더디면 수영 익히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저씨 얼굴에는 자기가 나보다 느리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한 게 보인다. 자유형도 아직 느린고 배영은 아직 시도도 못하고 있는데 평영을 시도하는 내가 싫은 것이다.


자신이 늦게 시작한 것이니 늦게 익혀지는 게 당연한 데 왜 나와 비교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를 알지도 못하고 나도 그를 모른다. 더 이상 물러날 데도 없고 예의는 다했으니 이젠 내 갈길 간다 하는 마음으로 수영에 임하고 있다. 10분 정도 남은 시간대에는 어느 레인이든 수영자가 거의 없다. 그래도 레인별 속도가 있으니 중급레인에서 수영을 했을지라도 평영이 초급이면 초급에서 하는 게 맞다.


귀찮아서 요령껏 하던 중급레인에서 평영을 연습하다가 너무 느리니 아무래도 누군가 수영에 방해를 받았나 보다. 끝나고 한 수영자가 조용히 다가와 다른 레인으로 가서 연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여 받아들였다. 그 뒤로 평영은 초급레인에서 익히고 있다. 그 아저씨의 불만 섞인 말에 설명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불만은 자신이 왜 옮겨야 하는가였다. 옮기기 싫으면 할 수 없지 알아서 각자 하는 수밖에......


두 바퀴를 10분 못돼서 평영으로 완주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만끽하고 있는데 그 아저씨 기다려다는 듯이 나를 보더니 제자리에서 나아가지 않는다고 소금을 뿌린다. '두 바퀴가 제자리이냐' 속으로 생각하면서 어이없어 ‘그래요? 제자리라고요?’ 하고 따라서 중얼거리며 어색한 웃음만 지어주었다.


너한테는 제자리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는 거북이처럼 가고 있었다고 속으로 중얼댔다. 저항을 덜 만드는 팔 동작과 앞으로 더 잘 나아가도록 다리로 물을 휘감아 뻗어내기를 조금씩 계속 수정하고 있어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만족하고 있어 그 아저씨 말에 크게 마음이 쓰이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내뱉는 말을 들으면 그들의 인격과 마음상태가 읽힌다. 시샘으로 상대의 기를 죽이려고 가르쳐 주는 척 지적질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말해주는 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사람 응원해 주려 미소로 답해주거나 잘한다고 늘었다고 격려해 주는 이도 있다.


어떻게 보면 공평하게 존재한다. 단지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느 한 곳에 꽂히면 마음이 상하게 된다. 기왕이면 마음 편한 쪽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그들의 시샘은 그들만의 것이지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것을 그들이 던졌다고 받으면 나만 힘들어진다. 수영 익히기도 힘든데 힘든 마음으로는 진도 나가기 어렵다.


어차피 나하고의 투쟁이지 남들하고는 상관이 없다. 남들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그들의 몫이지 나랑 관계없다. 나는 내가 하기로 한 평영을 계속 연습해서 조금씩 나아가면 된다. 처음 자유형 익힐 때 주위 사람들 반응들과 비슷하다. 그때도 답이 없다는 반응들이 많았는데 자유형을 익히고 어느덧 배영까지 익히고 평영을 익히고 있는 내가 얼마나 대견하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물에서 떠서 숨 쉬고 가주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 했는데 뭐야 평영까지 오다니. 그다음 접영도 익힐 거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비록 여기까지 오는데 근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나만의 속도일 뿐이다. 모두들 5~6개월 이내에 다들 수영 4종을 마스터하는가 보던데 난 두세 배 걸려도 포기만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며 익히고 있다. 어차피 내 몸이 익혀야 하는 운동이기에 바쁘게 할 필요 없다. 하나씩 내 몸이 익혀가는 게 뿌듯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머리를 버틸 힘을 기르고 뒤집고 기고 앉고 서는 과정을 보면 얼마나 더딘지 모른다. 그러나 젖 먹던 힘을 모두 동원해 매일 매시간 열심히 노력하는 것 보면 정말 감동이다. 그 아기처럼 나의 수영도 나에겐 감동이다. 포기하지 않고 익혀가고 있는 나의 수영이 나에겐 최고이다.


익사할 뻔한 경험이 두세 번 있어서 나에게 물은 공포 그 자체이다. 물속에 머리를 넣고 호흡을 익히는 자체부터가 커다란 투쟁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물이 무섭긴 하지만 친밀도 많이 생겨 어느 정도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공포는 마주하고 천천히 바라보며 진짜 공포인지 대책이 있는지 있으면 찾아서 익히면 된다.


물은 나에게 공포이자 친구이다.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수영을 익혔으니 압도되지는 않아서 좋다. 수영은 나에게 물로부터의 구세주인 셈이다. 그러니 잘하고 못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아직도 물속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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