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북 카페 좁은 탁자에 엎드려 자고 일어났다. 노곤함이 조금 풀린 기분이다. 아직 초점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멍하니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풍경처럼 보고 있다. 오랫동안 두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 수다하다가 이동을 한다. 몸도 주체하기 버거운 지 양산을 쓴 몸이 휘청거리어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나 보다.
실내에 같은 라인에 나와 좀 떨어져 앉아 있는 사람이 움찔한다. 내가 자신을 훔쳐본 줄 알았나 보다. 그 움찔함에 나도 정신이 들었다. 그 사이 할머니들은 어딘가로 이동하고 없다. 또 다른 사람들이 오고 간다. 걸음걸이가 어딘가 모르게 똑바르지 못하다. 아마도 어딘가가 불편한 것을 감추고 걷는 걸음새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불편한 게 보인다. 그 불편한 걸음들은 대부분 나이들이 좀 있어 보이는 아저씨나 아줌마들이다. 요즘은 아저씨 아줌마의 나이대가 분명치 않다. 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에 가까운 60대보다는 80에 가까운 노인네들이 아닌가 싶다.
내 나이가 60을 넘었으니 70이 되어야 할머니 할아버지라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아줌마 아저씨 나이가 길거나 할머니 할아버지 나이가 뒤로 밀려 짧아지거나 하는 것 같다. 씩씩하게 활동을 하면 아줌마 아저씨이고 거동이 불편하면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늦은 오후 거실 넘어 베란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에 오픈되어 있는 좁은 마당 같은 베란다에 빨래를 널어 말리는 작은 건조대가 보인다. 햇볕에 짱짱하게 마른빨래를 개킬 때 빳빳하고 뽀송한 감촉이 생각난다. 이 집으로 이사하면서 가전을 완전 갈아엎으면서 건조기를 샀다. 그렇게 밖에 빨래를 말리는 일이 없어졌다.
빨래건조대집과 맞붙은 집은 베란다가 반쪽이다. 거기에 보일러실이 반은 차지하고 있다. 손바닥만 한 공간에서 가끔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우리 집 건물이 좀 더 높은 지대이어서인지 한 층의 반 정도의 높이가 차이나 내가 내려다보이고 그들은 올려다본다. 우리 집은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하지 않아 안에서 밖이 잘 보이고 밖에서 안이 잘 들여다보일 것이다.
탁 트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긴 책상을 베란다 쪽을 향해 배치하고 앉아 있어서 가끔 그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가 있다. 주로 식사할 때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밥을 먹는데 그들이 그런 나를 보고 불편한지 올려다보고 있다. 내가 자기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이다. 주목하는 그들의 눈길을 느끼면서 그들이 나의 눈의 각도가 자기들을 탐색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눈길을 피하거나 자리를 피하면 진짜 그렇게 믿어버릴 것 같아 그대로 화면을 보면서 밥을 먹고 작업을 하곤 한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내가 여전히 별 반응이 없자 그들은 볼일을 마치고 자리를 뜬다. 그렇게 서로 약간의 불편을 느끼면서 몇 번 지나치니 그것도 적응이 되는지 서로 무심하게 상관하지 않게 된다.
처음엔 내 시야가 먼저이고 그들은 마당에 나왔다가 우연히 이웃집을 들여다본 꼴이라 그들이 시선을 거두고 피해야 하지 나한테 피하라는 것은 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것이라며 속으로 불쾌해했다. 그래 불편해도 참고 버티기도 했다. 이젠 불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물의 구조 때문이니 조심하자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 건물과 마주한 건물의 옥상에 두 사람이 나타나 나를 내려다본다. 저런 것이겠구나 싶다. 그들은 계속 보지는 않고 눈길을 피했으나 내가 그들에게 보인다는 게 느껴진다. 나도 정확하게 그들이 보이지만 눈길을 피하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실내가 적나라하게 보인다는 것에 불편하긴 하다.
간혹 더울 때 급하게 외출복을 훌러덩 벗고 옷도 갈아입고 했는데 바닥에 주저앉아 노출이 안 보이도록 더욱 조심해서 갈아입어야겠구나 싶다. 하긴 멀리 있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창문이 열려있으면 우연히 내부가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멀리 있는 만큼 세밀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래도 보인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도심에서는 건물 간의 공간이 작고 높이는 높아 일부러 의도하지 않아도 열린 창문으로 다른 사람의 내부 공간을 보게 되는 경우가 좀 있다. 가려져 있다는 것 때문에 은밀하게 훔쳐본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시선을 얼른 피하기도 하지만 모두 다 그렇게 피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창문을 열었을 때의 보일 공간 오픈을 생각해야 된다.
창밖을 보며 모든 것을 풍경으로 보면서 멍 때리기는 힘들이지 않게 휴식을 준다. 사적인 공간을 보호하는 건물이나 집에 창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집이 아니라 관이 되지 않을까. 죄인을 감금하는 건물도 최소한의 창을 만들어 최소한의 소통을 하게 해 준다. 창은 참으로 안과 밖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도구이다.
창은 언제 누가 고안했을까. 인간이 정착을 하면서 밖을 완전 차단하면 살아갈 수 없으니 만든 구멍으로 시작되었다 한다. 창밖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고 나가다 보니 막혔던 마음이 풀린다. 차 한 잔 더 하고 작업을 시작해 보자. 나의 마음의 창이 생각들을 들고 나가게 소통시켰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