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때보다 상처에 예민한 시대다. 정에 살고 정에 죽던 우리 민족이 급기야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고 마음을 꽁꽁 싸매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리가 인지하는 '상처'란 무엇일까? 배신과 공격, 위협, 선넘기만이 상처일까?
근 10여년 새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강력하게 강화된 처세원칙이 하나 있는데 바로 '기브앤테이크'다. 기브앤테이크는 원래 비지니스 세계에서 사용되던 용어인데, 최근에는 보편적 인간관계에서 두루 통용된다. 인간관계에도 거래할 것이 성립한다는 생각인데 비단 금전적 거래 뿐만 아니라 정서적, 감정적 거래 또한 유효하다.
나는 나름대로 저 사람에게 정도 주고 마음도 주고 물질도 주었는데, 저 사람은 나에게 그 무엇 하나 돌려주지 않는 것 같을 때, 심지어 뒤늦게 알고보니 사람들 무리에서 분조를 형성하여 나를 은근히 따돌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로부터 상처받는다.
기브앤테이크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빚'에 그치지만 다수의 무리 사이에서는 때로 따돌림이란 형태의 정서적 폭력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부정적 감정공격으로 자신의 증오심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로 사람의 심리를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그렇다. 사람은 직접적 공격 뿐만 아니라 소외와 거리두기로도 상처받는다. 관심과 유대는 사람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서적 영양분인데, 아무도 그것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사람은 시들어간다. 소외와 따돌림으로 인한 상처는 아픔 때문이 아니라 공허함과 정서적 허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이렇게 내 마음주머니를 사람들의 따듯한 관심과 온기로 채우고 싶어하는 우리들이 오히려 남들에게는 '적당한 거리두기'라는 초강력한 예방접종법으로 자신의 마음에 단단한 벽을 치려한다. 상처받지 않는 방법 중에는 이것만한 것이 없다며 여러 사람에게 권유하고 때론 충고하기도 한다. 때론 똑똑한 방법으로, 때론 최후의 수단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았다는 자각은 때론 공격성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구나'라는 육감이 발동하는 순간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솟아오른다. 미움의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면 결국 분노를 형성한다.
때문에 적당한 거리두기란 결코 상처받지 않는 기술도, 적절한 이익만을 취할 수 있는 방편도 아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거리를 두고 싶다면 그 관계는 결코 '적당'해질 수 없다.
적당한 거리두기는 '선넘지 않기'로 작동할 때 아름다울 수 있다. '적당히 마음주지 않기'가 된다면 그 사람도 귀신같이 내 속마음을 안다. 주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 것을 내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느끼기엔 인간관계란 10을 주고 1을 겨우 받아내는 것이 기대해볼 수 있는 최대한이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늘 실패다. 이런 보편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상처받지 않게 된다.
기브앤테이크는 이제 보편적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연인관계,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더치페이, 반반결혼, 셀프노후 등의 개념은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야'라는 속마음을 서로 낱낱이 드러내면서도 상처받지 않고 싶어 그럴싸한 합리화의 탈을 씌운 말장난이다.
누군가 적당한 거리두기로 일방적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아주 순진하거나 극단적으로 운이 좋은 상황일 것이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주 찾아오지 않는 자식보다는 늘 주위에 있어주는 지인들에게 더 마음을 쏟는다.
인간관계를 잘 하고 싶다면 '진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반드시 간과 쓸개를 다 내어주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싫은 손해를 입지 않고서도 따뜻한 관심과 사소한 연락만 정도면 그 사람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관심과 정에 굶주린 기아상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