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윗제니 Sep 03. 2017

함께 있는 엄마에게만 허락되는 순간의 알아차림

'촉'이란 게 뭘까요?


과거에 되풀이 되었던 어떤 미해결 사건들의 연결고리가 불현듯 순간적으로 이어지면서 '팍'하고 미스테리가 풀리는 느낌


아이를 키우다보니 이런 '촉'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분명히 어디서 많이 봤던 레파토리인데, 그 동안에는 원인을 몰랐었지만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바로 지금의 상황에서 과거 사건들의 맥락이 발견되고 그 미스테리가 풀리는 경험들이요. '나는 이것이 좋다, 나는 저것이 싫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키우려면 어쩔 수 없이 육감과 촉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런데 이 촉이란 것은 한두 번의 경험으로는 쉽게 쌓여지는 것이 아니고, 수십 번, 수백 번의 동일한 경험이 누적되고, 아이가 커가면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얻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준이는 돌 전 말을 하지 못하던 시기에 자동차에서 우는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아이가 자동차에서 울 때 부모인 저에게 처음 드는 생각은, '차에 타는 것이 싫어서'란 것이었습니다. 또는 '카시트에 앉는 것이 싫어서'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니 준이가 차에 타자마자 혹은 카시트에 앉자마자 우는 것이 아니었고, 차에 탄 후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단순히 차에 타는 것이 싫거나 카시트에 앉는 것이 싫어서 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준이가 어릴 때에는 자동차로 장거리를 뛰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울더라도 조금만 달래면서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우는 아이와 함께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팍'하고 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이가 우는 패턴이 저도 모르게 갑자기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이를 차에 태울 때에는 항상 뽀로로 동요를 틀어주곤 했는데,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라 아이도 잠자코 잘 듣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항상 어느 시점이 되면 울기 시작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싫어하는 노래가 있는 것이다'라는 가정을 해보았습니다. 준이가 싫어하는 노래가 무엇일까 궁금하던 저는 모든 노래마다 준이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고, 특정 노래가 바뀌는 시점에 항상 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기 때문에 제 생각은 '싫어하는 노래가 나와서' 운다는 데에 그쳐있었습니다. 그래서 싫어한다고 생각되는 노래가 나오면 점프를 시켜서 다음 노래로 재빨리 바꾸어주었습니다. 헌데 아이가 계속 그치지 않고 떼를 쓰고 짜증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싫어하는 노래를 바꾸어주었는데도 계속 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더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아이를 그냥 울도록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팍'하고 다른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싫어하는 노래가 나와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노래가 끝나서'는 아닐까? 왜냐하면 그때쯤 아이는 집에서 동물 중에서 고래를 제일 좋아했고, 뽀로로 중에서도 고래가 나오는 장면을 좋아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그 느낌이 바로 정답이었습니다. 준이는 '고래의 노래'라는 뽀로로 동요를 가장 좋아했으며, 그 노래가 끝나면 울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맞는지 테스트해보기 위해서, 노래가 끝나서 우는 아이에게 다시 그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방긋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가 평상시에 고래를 좋아했다는 꾸준한 관찰의 경험이 차안에서 뽀로로 동요 메들리를 틀어줄 때마다 아이가 진정으로 우는 원인을 알아차리게 한 것입니다. 돌 전 아이가 자기만의 음악 취향이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고, 그 음악 취향의 원인이 '등장인물'에 기인한다는 점도 신선했습니다. 어쨌건 아이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돌봐오지 않았더라면 끝끝내 알아내지 못했을 사건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를 재울 때마다 아기 이불을 덮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재울 때마다 아이가 심하게 울어서 잠을 재우기 어려운 나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초보엄마였던 저는 당연히 잠투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안아서 재우건 업어서 재우건 일단 아이를 재운 후 눕혀서 이불을 덮어주는 방법밖에는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고, 매일 반복되던 재우기 씨름을 하던 중 불현듯 '팍'하고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 이불이 싫은건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준이를 제 침대에서 같이 재우고 있었는데 저는 어른이불을 덮고, 준이는 아기 이불을 덮여 재우고 있었습니다. 어른 이불은 너무 두꺼웠기 때문에 아이가 답답할 까봐 아기 이불을 덮어주었던 것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른 이불을 아이에게 덮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꺄르르하고 웃는 것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이가 어른이불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재우기가 매우 수월해졌습니다. 일단 눕혀놓고 어른 이불을 덮어주면 아이가 행복해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여름인데도 두꺼운 어른이불을 고집하는 아이 때문에 난처하긴 했지만 일단 아이가 원하는 이불을 만지면서 잠들게 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이불에 집착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한 것이었습니다.


세월은 또 흘러흘러 준이가 많이 자랐습니다. 3살쯤 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아이를 재우려고 또 눕혔는데, 준이가 갑자기 '파란이불! 파란이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그 어른 이불은 파란색 줄무늬가 있는 이불이었지만 파란색의 비중이 매우 적었습니다. 거의 흰색이불이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인데 '파란이불'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준이는 이 이불을 파란이불이라고 인지하는구나, 준이 시각에는 파란색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거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준이가 파란색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저희 집에는 준이의 물컵이 10개 정도 있는데 각 컵마다 색깔이 다릅니다. 그 중에 단 한개만 파란색 컵입니다. 아이가 말을 못할 때에는 그냥 제 손에 잡히는 대로 임의로 컵에 물을 따라서 아이에게 먹이곤 했는데, 아이가 이 때에도 종종 울곤 했습니다. 지가 물 달라고 해놓고 울어대니 저는 또 답답하고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파란 이불의 비밀이 풀리면서 준이의 색취향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준이에게 파란색 컵으로 물을 주며 아이를 울리는 횟수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 이불의 비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준이가 5살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놈의 파란이불을 덮고 자려했기 때문에 여름에는 파란이불 속의 솜을 빼서 따로 보관하고 커버만 남겨둔 채 준이에게 덮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녀석이 갑자기 파란이불에 살을 부비더니 웃으면서 '시원해! 시원해!'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시원한 감촉이 좋아서 파란이불을 좋아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파란색이어서 좋아한 것도 있었지만 이불의 감촉이 아이에게 시원하게 느껴졌던 것이었습니다. 이제야 이불의 비밀은 완전히 풀렸습니다. 아이를 키운지 만 4년째에야 겨우 풀린 이불의 비밀. 그 이후로도 저는 준이가 '시원한 감촉'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시원한 감촉의 아이스 원단의 옷들을 구매해서 입혀주면 아이가 시원하다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도 시원한 감촉이 나는 사물을 좋아했습니다. 아이가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보다는 시원한 감촉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수년 전 '혹시 이 파란 이불을 좋아하나?'란 순간의 알아차림으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6살이 되었고 거의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간혹 아이가 자기자신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가령 아이는 외출만 하면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아이가 안기는 기분이 좋아서인줄 알았지만 최근에는 어른 높이에서 세상을 보고 싶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아이와 대화하다가 '팍'하고 '아 그래서 그때 그렇게 울었구나'하는 순간들이 간혹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니 나름대로 자기 표현을 하게 되었고, 그런 대화의 내용들 중에는 아이가 어린시절부터 일관되게 가지고 있던 아이의 특성들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함께 있는 엄마에게만 허락되는 순간의 알아차림. 전업맘일수록 이런 알아차림의 빈도수는 더욱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아이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나갈 때마다 그렇게 뿌듯하고 보람될 수가 없습니다. '아 내가 그래도 이렇게 아이와 같이 있어주니까 이런 비밀들도 알 수 있게 되는 구나'하고 저 자신이 대견하고 기특하기까지 합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전혀 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행동의 원인을 파악해내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엄마의 육감과 촉이 발달해갑니다. 이런 깊이 있는 아이에 대한 이해는 결국 아이와의 애착과 유대감으로 발전하고, 아이가 엄마를 신뢰하고 존경하게 만들어 줍니다. 준이가 6살이 되도록 엄마가 반대하거나 허락하지 않는 행동은 결국 엄마의 뜻을 따라 주었던 것이 바로 이런 신뢰와 유대감이 기반이 된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6살이 되니 폭력성이 커진 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