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이는 생후 153일째가 되어서야 뒤집기를 겨우 했다. 생각보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의 첫뒤집기 순간을 놓쳤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 반면, 나는 준이가 처음 뒤집기를 할 때 정확하게 그 장면을 지켜봤었고 근처에 있던 DSLR 카메라로 바로 촬영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너무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버둥거리는 모습으로 봐선 근력이 약한 아이가 절대 아닌 것 같은데, 만 5개월이 다 되어가도록 도통 뒤집기를 하지 않는 아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 것이 만 4개월째 되던 날부터였다. 조리원 동기 아기들이 하나둘씩 뒤집기를 성공했다는 SNS 간증글을 읽어보며 더더욱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던 초보엄마였다.
그 무렵 준이는 몸을 반 뒤집어서 같은 자세로 30분이고 누워 있었다. 팔 하나만 빼면 될 것 같은데 매일매일 반만 뒤집은 상태로 폴더매트를 손톱으로 박박 긁으며 놀곤 했다. 어찌나 속이 터지던지... 뒤집기 안하는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엄마는 내 속을 모를 것이다.
준이는 왜 뒤집기를 하지 않았던 것일까?
엄마인 나로서는 다양한 가설 중 이런 가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유난히 마른 몸, 너무나 가느다란 목, 몸에 비해 엄청나게 큰 머리 크기 때문에 목을 들어 올리는 힘이 약해서 뒤집기를 못하는 것이라고.
앞뒤옆짱구인 준이는 영유아검사를 하면 머리둘레가 95 퍼센타일정도가 나오는 엄청난 머리의 소유자다. 반면 목은 가늘가늘하다. 그 가느다란 목이 큰 머리를 지탱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다.
역시나 엄마의 육감은 정답이었다. 준이는 153일째 뒤집었고, 그 이후로 기기, 걷기, 뛰기 모두 무리 없이 소화하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 어디 문제가 있는 아이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느다란 목과 큰 머리, 대근육발달이 더딘 탓이었다. 준이는 그 후로도 대근육 발달이 계속 더딘 편이어서 만 15개월경에 완전히 걸었고, 만 30개월경에 두발모아뛰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준이는 성격적으로 매우 조심성이 많고 겁이 많은 아이다. 다른 친구들이 콩콩거리며 두발모아뛰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하고 싶어서 시도는 하는데, 한 발이 마저 떨어지지 않아서 항상 실패를 했다. 아마 뒤집기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안한 채 5개월을 버텼던 것 같다. 6살 준이는 키우는 나는 이제 준이가 '조심성이 많고 겁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3살 준이를 키우는 나는 '왜 우리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을 못할까?'란 생각에 그쳐 있던 초보엄마였다. 막연히 육감적으로 '우리 아이가 성격이 조심스러워서 그런 것인지도 몰라'란 느낌은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내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그 느낌은 정답이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아이에 대한 판단 모두 아이를 오래 지속적으로 관찰해온 결과 갖게 된 엄마만의 육감은 항상 옳다는 것을.
교육에 대한 부분도 그렇다. 준이는 영어 거부증이 매우 심한 아이였다. 만 3돌 전에 영어책도 읽어주고, 그림카드도 보여주며 영어에 대해 노출을 해주려고 부단히 노력해왔었지만 준이는 내 입에서 영어단어만 나오면 신경질과 짜증을 내며 도리도리를 해댔다. 다른 집 아이들은 영어건 한국어건 노출해주는 대로 곧잘 따라 하기도 하고 노래까지 부른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는데, 우리 집 아이는 영어만 들려주면 짜증과 신경질을 내곤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 때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느낌은 '준이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한 것 같다' 였다. 역시나 내 느낌은 옳았다. 6살 준이는 어떤 규칙이든 한번 알려주면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아이다. 덕분에 아이 머릿속에 한번 제대로 된 개념을 잡아주면 아이가 그대로 규칙을 잘 지키기 때문에 키우기 수월하기도 하다. 반면 자기가 한번 비딱한 개념을 잡은 것이 있으면 그 개념을 바로잡아주기가 매우 어렵다. 자기가 지키고 있는 가치에 대한 신념과 고집이 강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살 무렵 '왜?'라는 질문이 터지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나의 육감싸움이었다. 아이의 '왜'에 대한 질문이 중구난방이었기 때문이다. '왜'라는 의문문의 형태를 띄었지만 사실은 다른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령 나의 친정엄마는 안경을 쓰고 계시는데, '할머니 왜 안경 썼어요?'라고 묻는 것이다. 할머니는 곧이곧대로, '눈이 나빠서 안경을 썼지.'하고 대답하셨다. 그런데도 또 '그런데 왜 안경 썼어요?'라고 질문을 반복했다. 할머니는 '눈이 나빠서 안경을 써야 잘 보이지'하며 안경을 쓴 이유에 대해서만 해명을 하셨다. 그런데 아이의 질문의 의도는 따로 있었다. 할머니가 안경을 안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왜 안경을 썼냐'는 질문의 형식을 빌어 말했던 것이었다. '왜'라고 묻고 있지만 실상은 그것이 싫다, 혹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속뜻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이의 언어 중에는 질문이지만 사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숨어 있는 경우가 참 많았다.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상황들,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의 행동과 말을 접할 때 '설마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하고 마음속에 몇 가지 대답이 떠오르곤 한다. 논리적으로 설명은 안 되는 데, 막연히 그런 것 같다고 느껴지는 이 기분을 사람들은 육감이라고 부른다. 나는 아이에 대한 엄마의 육감은 항상 옳다고 믿는다. 엄마의 육감은 다른 사람이 찾아내지 못하는 원인을 발견해내기도 하고, 미래를 점치기도 한다. 또한 아이에게 가장 잘 맞는 양육법을 찾아내기도 하고, 내 아이에게만 맞는 맞춤형 훈육 법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이런 엄마의 육감이 잘 발달하려면 엄마도 아이와 애착을 공고히 잘 쌓아야 함은 물론이다. 엄마와 아이의 애착은 상호작용하며 더욱 커지고 발전하는 에너지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