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옹이놀이터 Aug 28. 2015

제주 올레길 12코스 느리게 걷다.

오래전부터 올레 길을 걷고 싶었다.

하지만 몇 년전 올레 길을 걷다가 한 여성이  성폭행당했다는 기사를 접한 후부터 혼자 걷기가 두려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작년 동네언니 동생들과 함께 제주도에 왔을 때 올레 길을 걸을 참이었다.

하지만 그땐 날씨가 흐려 우린 올레길을 걷지 못했다.

그래서 더 걷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3박 4일 일정 중에서 하루라도 꼭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함께 걷기’라는 프로그램에 신청을 했다.

드디어 내일이다.

그런데 밤이 되자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비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태풍이 오나보다. 헉! 이번에도 안 되는 건가?

아쉬운 마음에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깥 날씨를 살폈다.

이럴 수가 해가 뜨기 시작했다.

비도 오지 않고 약간 흐린 날씨. 비가 오면 어쩌나 싶다가도 멀리서 해가 나오는 것 같아 안심을 하고 준비를 했다.    

이른 아침을 먹고 무릉생태학교로 출발. 

그곳이 12코스 시작점이다. 오늘은 ‘함께 걷기’ 12코스 걷는 날이다.

처음 걷기 시작할 때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말없이 걷는 것은 어색했다. 하지만 함께 걷기 자원봉사자들의 배려로 그 어색함은 곧 친근함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경계 없이 나를 자연의 일부로 느끼는 것 같았다.

제주 올레길이 좋아 매주 금요일마다 비행기로 와서 올레길을 걷고, 일요일이 되면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 결국 제주에 눌러앉게 된 자원봉사자 이야기, 노부부가 결혼기념일을 맞아 제주올레길을 완주하고 1년 넘게 제주에 살게 된 이야기,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에 와 돈 떨어지면 가끔 노가대하며 올레 길과 함께 살고 있는 노총각의 이야기 등.

제주 올레길이 좋아 결국 제주에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는 꼭 1년만이라도 그들처럼 살아보고 싶다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가볍고 느렸다.     

처음에는 그 느림이 싫었다.    

주위의 풍경을 볼 겨를도 없이 빨리 산을 오르듯 빨리 풍경 좋은 곳을 걷고 싶었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들은 간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느리게 걷기를 유도했다. 그래야만 주위의 것들을 자세히 보고 충분히 그 길을 담아갈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간세란 제주올레의 상징인 조랑말의 이름으로 느릿느릿한 게으름뱅이라는 뜻이다.     

펼쳐진 밭과 돌들, 간혹 보이는 초록색 물탱크.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집. 

처음 1시간은 걷는 것이 지루했다.

바람도 많이 불었고, 어제 온 비로 길들도 질퍽거렸다.

하지만 중간쯤 지나서인가 바닷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다.

바다 저 멀리 해는 구름들 속에서 꼭 곧 천사가 내려올 것 같은 빛을 만들어냈다.

이런 멋진 길이 있었나?

제주도에는 관광지가 많다.

하지만 걷는 길 마다마다 자연 자체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어느 유명한 관광지보다 큰 감동을 주었다.

지금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수월봉과 당산봉에 이르러서 그 풍경은 절정을 이루었다.

내가 선택한 여행 안에서 이런 풍경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산 정상에 오를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와 그 바다 사이사이에 있는 섬들.

그 섬들 위로 지나가는 구름과 그 속의 빛들은 잔치집마냥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활기찼다.

어떻게 이런 풍경들이 있지? 감탄에 감탄이 더해져 카메라 셔터는 쉴 새 없이 눌러졌다.

내 걸음걸음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못내 아쉬워 그곳에 오래 있고 싶었지만 나를 소리 없이 기다려주는 분들이 많아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진중하게 찍을 걸.

그 멋진 풍경을 그대로 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내 삶에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을 날이 얼마나 될까?    

여행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다시 올 수 있을까? 나 홀로 여행하는 상상을 할 수 없었기에 여행기회가  올 때마다 난 무슨 한이라도 풀 듯 그렇게 감동하며 아쉬워했던 것 같다. 그런 반면 내 걸음이 아닌 다른 이의 걸음에 맞춰 여행하는 것에 대해 늘 뭔가 부족해하고 후회가 있었다. 때론 일처럼 느껴질 만큼 힘들기도 했다.

나에게 맞는, 내가 하고 싶은 긴 여행이 필요했다.

그 시작이 이번 여행이었다.    

3박 4일의 일정이 끝나가고 있다.

처음의 두려움은 없어지고 지금 나에게 남은 건 여전히 아쉬움이다.

더 있으면 좋으련만.

내 나이 43살, 혼자 하는 첫 여행은 흡족했지만 짧았다.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책임지고 누릴 수 있었던 3박 4일.

특별했다. 

참나! 갑자기 슬퍼진다.

3박 4일 동안 내 삶을 살았는데 그 날들이 특별했다니.

제주 올레길을 걷던 그 자원봉사자 말대로 난 늘 특별하게 살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면 

어떻게 하면 특별한 날이 일상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해볼 참이다.    

지금 시각 자정이 지난 42분.

돌아온지 5일째 되는 날.

오늘 하루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특별한 날을 꿈꿨다.                              2015. 08. 19. 00:5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