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독서 모임에 갔다가 끝까지 있지 못하고 서둘러 찻집을 나섰다. 오늘은 딸아이가 일주일간의 부산 방문을 마치고 조치원에 있는 친구 집으로 가는 날이다. 얼른 아침을 차려주기 위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솥밥을 짓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삼겹살을 굽고, 딸이 좋아하는 양상추 샐러드도 준비했다. 밑반찬까지 한 상이 푸짐하게 완성되었다. 이제 이 밥을 먹고 나면 또 언제 정성껏 차린 밥을 먹일 수 있을까. 딸의 입으로 들어가는 한 숟가락, 한 젓가락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집에 오니 어때?"
"부산은 여유가 있어서 좋아요. 집도 넓고, 가만히 있어도 엄마가 밥을 차려주시고, 환기도 잘되고 햇빛도 잘 들어오고요."
다시 서울의 5평짜리 원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답답한 듯했다. 게다가 월요일부터는 새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 그래도 새 회사에는 헬스장과 샤워실이 있어 운동을 시작해 보겠다고 한다.
"근데... 저 OO이랑 헤어졌어요."
예상치 못한 고백이었다.
"그래? 마음 아프겠다. 무슨 일이 있었어?"
"며칠 동안 연락도 안 받으면서 SNS에는 노는 사진을 올리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결국 욕하고 헤어지자고 했어요."
"잘했어. 배려 없는 사람과 만날 필요 없지."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나는 그런 딸을 있는 힘껏 위로해 주었다.
밥을 먹고 나서 지하철역까지 배웅했다. 옷과 반찬을 챙겨주니 짐이 잔뜩 늘었다. 친구 부모님께 드릴 삼진어묵 세트를 살 용돈도 쥐어주었다. 한 손에는 큰 가방을 들고, 어깨에는 배낭을 멘 채 걸어가는 딸의 모습이 한없이 안쓰러워 보였다. 세상 속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딸은 먹고 싶던 방어회랑 돼지국밥도 먹고, 설날 음식도 맛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쉬기도 했고,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하얼빈 영화도 보고, 가족사진도 찍고, 삼촌들과 만취할 정도로 술도 마셨다.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딸은 어느새 훌쩍 자라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작년 한 해 동안 많이 성장한 것 같아?"
내 질문에 딸은 빙그레 웃으며 되묻는다.
"엄마는 얼마나 성장했어요?"
순간, 나도 돌아보게 되었다.
"엄마도 많이 성장했지. 책도 많이 읽고, 독서 모임도 나가고, 브런치 작가도 되었잖아."
딸만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나 역시 아이를 독립시키고, 나만의 방식으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인생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일주일은 짧았지만, 가족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런 딸을 보며 안도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어느덧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딸이 떠난 후, 나는 조용해진 집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따뜻한 밥 냄새가 남아 있고, 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딸은 이제 혼자서도 씩씩하게 살아갈 힘을 길러 가고 있지만, 여전히 엄마 품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든든한 집이자 안식처가 되어 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딸을 위해 정성껏 밥을 짓고,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를 건네는 동안 나도 성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가 독립하는 과정이 단순히 ‘떠남’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 각자의 자리에서 더 단단해지는 과정이라는 것을.
딸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듯, 나도 내 삶을 사랑하며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할 것이다.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만나는 날 오늘처럼 정성껏 밥을 차려주고 싶다. “우리,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라고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