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부터 주말농장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무 평 남짓 망설이며 시작했지만, 주변에 놀고 있는 땅이 자꾸만 눈에 밟혀 야금야금 밭을 넓히다 보니 어느새 서른 평이 훌쩍 넘는 대농이 되어 있었다.
작년까지는 시골 거제도에서 시어머니가 짓는 밭을 한 달에 한두 번씩 내려가서 도왔다. 때마다 고추며, 배추, 파, 고구마, 감자 등 제철 채소들을 한 아름 받아와 먹었다. 사실 우리 집에서 먹은 양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 귀한 채소들을 친정어머니께 거의 다 가져다 드렸다. 엄마는 시골 채소들로 김치도 담그고 나물과 반찬을 만들어 우리 집과 형제들, 이웃들에게도 넉넉하게 나눠주셨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그 밭은 이내 잡초로 뒤덮였다. 우리도 더 이상 그 밭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친정엄마 집에 가져다 드릴 채소가 없다는 사실이 유난히 허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느닷없이 주말농장을 해보자고 했다. 집에서 20분쯤 떨어진 한적한 곳에 텃밭을 마련하고, 그 후로 매주 주말마다 흙을 만지며 농부생활이 시작되었다. 씨앗을 뿌리고, 손톱만 한 새순이 솟아나며, 비를 맞고 햇살을 받으며 쑥쑥 자라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기대 이상으로 빨리 자라는 것은 채소보다 잡초였다. 잡초를 뽑느라 주말뿐 아니라 주중에도 틈틈이 밭으로 향했다. 어느 날은 멀쩡하던 채소밭이 폐허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근처 염소가 우리 밭에 뛰어 들어와 채소를 모조리 먹어치운 것이다. 허탈하고 속상했지만 우리는 다시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밭은 어느덧 서른 평이 넘었고, 키우는 식물만 서른 가지가 넘었다. 이제는 마트에서 야채를 살 일이 없어져, 텃밭에서 장을 보듯 채소를 골라 집에 가져간다. 텃밭은 남편의 자부심이 되었고, 우리는 주말마다 친구들을 초대해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우리 밭의 대표 작물은 상추였다. 조선상추, 꽃상추, 로메인, 유럽상추 등 상추만 일곱 종류. 손님이 오면 삼겹살 한 점에 상추, 쑥갓, 치커리, 깻잎 등 다섯 장의 채소를 푸짐하게 싸서 먹게 했다. 친구들은 채소가 맛있다고 매번 엄지 척을 해주었다. 파티가 끝나면 상추를 모조리 따서 한가득 싸주었지만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두 달 동안 주말마다 상추 파티가 이어졌고 친정 가족을 비롯해 일곱 팀이 우리 밭을 다녀갔다. 대접하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나누어 먹는 즐거움이 그보다 컸다. 누군가 상추가 맛있다고 할 때면 내 자식 자랑을 듣는 듯 어깨가 절로 으쓱했다. 상추는 정말 지치지 않는 무한 화수분 같았다.
7월에 들어서고 기온이 30도를 넘기자, 보드랍던 상추들이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했다. 잎은 시들고, 대가 두꺼워지고, 꽃이 피어나 쌉쌀한 맛이 강해졌다. 두 달간 이어진 풍성한 상추잔치가 끝났다. 이제는 고추와 옥수수의 계절이다. 나는 회사 직원들과 모임 멤버들에게 상추, 고추, 파를 한 아름씩 나눠주었고, 맛있다는 말에는 호박과 가지까지 덤으로 얹어주었다. 옥수수도 삶아서 맛보게 했고 텃밭에서 자란 채소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나누어 먹었다.
주말인 오늘 아침, 유럽상추와 비트잎에 발사믹 소스를 뿌린 샐러드에, 공심채를 볶고 옥수수를 삶아 한상을 차려 먹었다. 속은 편하고 기분은 든든하다. 점심은 삶은 국수에 오이, 당근, 상추, 깻잎을 듬뿍 넣고 초고추장에 비벼 한 그릇 뚝딱. 저녁은 호박과 부추를 넣은 야채 전과 상추, 치커리, 부추로 만든 겉절이. 후식은 텃밭에서 딴 참외 두 개. 하루 식단이 밭에서 시작되어 밭에서 끝났다.
시장 채소는 양념의 맛으로 먹곤 했는데, 밭에서 키운 채소는 별다른 양념 없이도 채소 그대로의 깊은 맛이 난다. 상추는 부드럽고 쌉싸름하며, 호박은 단맛이 은은하다. 가지는 쫄깃, 오이는 생생한 초록의 맛이다. 고추는 아삭하며 참외는 시원하고 달콤하다. 양배추는 탱글탱글 속이 꽉 찼으며, 당근은 단단하면서도 고소하다. 이렇게 매일 자연 그대로의 밥상을 차려 먹으니 몸도 마음도 편안하고 아침마다 자연스럽게 속을 비울 수 있다.
요 며칠 이어진 폭우에 전국적으로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밭은 괜찮을까 마음이 쓰여,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 밭으로 나가보았다. 키가 큰 상추대와 공심채는 거센 비바람에 쓰러져 누웠지만 뿌리가 깊은 옥수수는 끄떡없었다. 고추와 오이도 튼튼한 지지대 덕분에 이리저리 휘청이긴 해도 꿋꿋하게 버텨주었다. 호박과 고구마 줄기는 오히려 더욱 정글처럼 무성해졌다. 농부 마음이 이런 걸까, 내 손으로 일군 작물들이 걱정되고, 며칠만 보지 않아도 보고 싶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고 기특하다. 나도 모르게 ‘농심’을 품게 된 것 같다.
조금 전,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내가 준 공심채로 볶음요리를 하고, 가지를 구워 상추와 고추, 깻잎까지 곁들여 저녁 한 상을 차려먹었다는 인증샷이었다. 동남아에서만 보던 공심채를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했다던 친구가, 생각보다 맛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텃밭에서 시작한 마음 한 자락이 이렇게 이웃, 가족, 친구들에게 넓게 퍼져나갔다. 삶은 얻는 것만큼 나누는 기쁨이 훨씬 크다는 걸, 흙을 만지며 비로소 알게 됐다. 식탁 위에서 가까이 마주하는 자연의 맛과, 나눔의 행복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땅은 정직하다. 뿌린 만큼 거두고, 정성을 다한 만큼 돌려준다. 햇살과 비와 바람, 자연의 조화가 소중하고 작은 텃밭에서 식물들과 함께 나의 마음도 자라나고 있었다. 삶도 흙처럼, 나누며 살아가야 진짜 넉넉해진다는 걸, 자연 속에서 야무지게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