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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27. 2024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광주, 기억의 무게

대학 시절이었다. 선배들의 권유와 압박에 떠밀려 인문사회과학 동아리 토론회에 나가게 됐다.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광주학생운동 사진첩을 보았다.

당시 ‘인문학’이라 하면, 사회에 대한 급진적 인식과 함께 금서로 지정된 서적들을 읽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늘날처럼 고전 문학이나 깊이 있는 사고방식을 뜻하는 단어는 아니었다.



사진첩 속에는 그 시절의 잔혹한 현실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의경들에게 곤봉으로 맞아 쓰러지는 청년들, 발가벗겨진 채로 처참히 훼손된 시신들, 선명한 칼자국과 총탄 자국… 공포와 분노로 얼룩진 흑백사진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그렇게 나에게 공포와 분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신입생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서 사회 부조리를 깨닫고, 그 울분을 학생운동으로 표출하게끔 한 장치중 하나가 광주의 사진첩이었다.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토록 잔혹했으며, 그것은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쥔 이가 저지른 폭력의 일면이었다.



그 당시 ‘독재 타도, 대통령 타도’는 대학생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시대적 의무였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 당시 공장에서 하루 15시간씩 일하며 실밥 먼지를 폐에 들이마시고, 각성제를 먹어가며 버텼던 여공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결혼해 편안한 일상을 누리며 늙어가고 있을까, 아니면 과로와 병으로 고통받고 있을까?

10대부터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도 낳았을까? 장시간 미싱을 돌리며 숙련공이 되었을 것이고 노동법의 변화로 과거와 같은 열악한 환경은 조금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주를 직접 겪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상처는 과연 어떻게 치유되었을까?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속 작가가 겪은 충격도 나와 비슷했을 것이다. 작가 한강은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광주항쟁에 대해 들었고, 사진 속 처참하게 무너진 현실을 보며 감정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중학생으로 항쟁 중 목숨을 잃은 ‘동호’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광주의 비극을 재현한다. 한강은 형으로부터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그 소명을 소설에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대학 시절 광주학생운동 사진첩 속 인물들이 떠올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왜 그토록 잔혹한 행동들이 자행되었을까?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양심은 없어져야만 하는가? 그토록 비인간적인 명령을 수행할 정도로, 명령을 내린 권력자의 욕망은 참혹했다.



‘인류는 원래 잔인한 종족인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피엔스를 읽으며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원주민을 몰살시키며 그 역사를 “위대한 개척”으로 미화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서양인들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최소한 동양의 문화에서는 인종 자체를 말살하지는 않는다고 위안을 삼았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광주에서 우리 민족이 자행한 잔혹함을 보면서, 인간의 잔혹성이 국가와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광주에서 자행된 폭력은 단지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가혹했다. 여성의 가슴을 도려내고 성고문까지 자행하는 그 끔찍함은 집단 광기의 발현이었다. 그 군인들 역시 평범한 가정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을 텐데, 그들이 폭력적 집단 심리에 의해 악몽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고통이 피어올랐다. 25년 전 광주학생운동 사진첩을 보며 애써 외면했던 나의 회피가 떠올랐고, 그 세월 속에 묻혀버린 아픔이 다시금 밀려왔다. 쉽게 잊을 수 없는 이야기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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