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란을 잠시 내려놓고 금정산 자락, 범어사 템플스테이에 몸을 맡겼습니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아침 예불의 청량함, 숨 가쁘게 이어간 108배, 알알이 마음을 꿰어 만든 염주, 깊은 고요가 머무는 명상. 그중에서도 가장 맑게 기억에 남은 시간은 장산스님과 마주 앉아 차를 나누던 시간이었습니다.
출가하신 지 11년이 되었다는 장산스님의 이력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미국 시민권자로 대학까지 미국에서 마친 스님은, 한인 사회의 중심인 교회를 성실히 다니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을 바꾼 건 대학교양 수업으로 들은 '불교 철학' 한 문장이었습니다. 의무감으로 향하던 교회 대신,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철학에 매료된 그는 졸업 후 한국으로 건너와 범어사에서 수계를 받았습니다.
영어로 법문을 하시는 스님 덕분인지 템플스테이 참가자의 절반은 외국인이었습니다. 숙소 아래 공터에는 늘어나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한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죠. 누군가 스님에게 앞으로의 꿈이나 목표를 물었습니다.
"특별한 꿈이나 목표는 없어요. 그저 지금 맡은 템플스테이를 잘 운영해서, 더 많은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을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매일의 하루를 소중하게 잘 살아내는 것, 그것이 제 유일한 목표입니다."
명상 시간, 요즘 나의 화두였던 '존재가 본질을 앞선다'를 가만히 읊조려 보았습니다. 사물은 용도가 정해진 채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어떻게 쓰여야 한다고 정해진 운명 같은 걸 붙이고 나오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온 특별한 '이유'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왔기에' 비로소 용도가 생겨난 것입니다. 지금, 여기,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나의 쓰임은 오로지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차 한 잔의 온기와 함께 밀려왔습니다.
절에서는 수행자로, 회사에서는 직원으로, 집에서는 주부로. 내게 주어진 역할마다 최선을 다해 머무는 것. 이 세상에 온 거창한 이유를 찾느라 방황하기보다, 지금 이곳에 생겨난 소중한 쓰임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히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자리를 충실히 채워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가장 다정하게 대하는 법임을 스님의 찻잔 속에서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