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정 Nov 22. 2024

인생이란 고스톱 한판

스무 살 즈음, 엄마는 밤마다 내게 하소연을 쏟아냈다.
"너도 이제 성인이니 알 건 다 알 거야. 아버지가 요즘 밤에 내 옆에 안 와. 여자가 생긴 것 같아."
막 스물을 넘긴 내가 알긴 뭘 알았겠는가. 그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매일 밤 엄마는 아버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너희 아버지가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던 아버지가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때 정말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버지가 바람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아버지가 춤바람이 났다. 사교댄스를 배우러 다니면서 한 아줌마를 알게 된 것이다. 엄마가 그렇게 믿던 의심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기막힌 추격전

그 후 엄마와 아버지의 쫓고 쫓기는 치열한 추격전이 시작됐다. 엄마는 아버지가 다니는 사교춤 클럽을 알아내 잠입을 시도했고, 아버지는 이를 피해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는 결국 아버지와 그 아줌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눈이 뒤집어졌다. 엄마는 길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웠고, 아버지와 그 아줌마는 줄행랑을 쳤다. 싸움의 현장엔 엄마 혼자 남아 고함을 지르다 지쳐 떨어졌다. 그날 밤, 엄마가 집에 들어온 아버지에게 따지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일관되게 말했다.
"그런 일 없다. 네가 잘못 본 거다."

엄마는 기가 막혔지만, 싸움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싸움을 피하기의 고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어설픈 아버지의 춤바람은 계속 엄마에게 들켰고, 그때마다 또 다른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엄마도 몰랐던 엄마의 인생

아버지의 짝사랑으로 결혼한 엄마는 평생 무뚝뚝한 남편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나 아버지가 춤바람이 나자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그 스트레스를 모두 내게 쏟아내며 나는 엄마의 ‘욕받이’가 되어버렸다.


가끔은 내 나이대의 엄마를 떠올려본다. 엄마가 쉰이었을 때 나는 서른, 두 아이의 엄마였다. 엄마가 마흔 일 때 나는 스무 살 대학생이었다. 그때는 엄마가 세상 모든 것을 아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나이를 되짚어 보면 쉰도 마흔도 인생의 정답을 알기는커녕 헤매기 바쁜 시기였다. 나는 쉰이 넘은 지금도 아직 철들지 못했고, 마흔에도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서른에도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고, 스물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다.


스무 살에 결혼한 엄마는 시부모와 치매 걸린 시할머니까지 모시며 남편 없이 농사에 아이까지 키우며 시집살이를 했다. 내가 첫째였으니, 스무 살 아이가 아이를 낳아 키운 셈이었다.

엄마가 사기도 당하고 빚도 지게 만들면서 나를 힘들게 만들었지만, 엄마도 철이 없었고, 인생을 잘 몰랐던 게 아닐까.


엄마의 나이를 지나가며 점점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았던 엄마의 건강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40대에 담배를 끊고 평생을 잡곡밥에 생선과 야채 반찬만 먹었다. 매주 등산을 하고 사교댄스를 하니 운동량도 만만치 않았다. 엄마는 잡곡은 입이 까끌거린다며 입에도 대지 않았고 흰쌀밥만 먹었다. 좋아하는 반찬은 젓갈, 김치, 장조림 등 짠 음식 일색이었다. 운동은 평생 해본 적이 없었다.


건강식만 먹고 건강한 생활방식만 고수했던 아버지는 위암, 전립선암 등 암이 두 개나 걸려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치매에 걸려 있다. 평생을 고통받고 힘들게 살았던 엄마는 90살까지 장수하셨던 외할머니의 피를 물려받아 지금까지 큰 병 한 번 걸린 적 없이 건강하다.


인생이란 고스톱 한 판

몇 년 전, 나와 두 남동생은 엄마와 고스톱 판을 벌인 적이 있다. 타짜라고 자부하던 엄마는 우리 세 초짜들에게 돈을 홀라당 다 잃었다. 고수들끼리는 행동 패턴이 있어 서로 예측이 가능한데, 게임 룰도 모르는 초짜들의 엉뚱한 플레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다시는 우리와 고스톱을 치지 않는다.


인생도 고스톱과 같다. 고수가 초짜에게 당할 때도 있고, 초짜가 고수를 꺾는 기적도 있다. 한 판에 모든 것을 날릴 수도 있지만, 예상치 못하게 쓰리고에 흔들고 피박을 씌울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싸기도 하고, 그다음 장에 무엇이 넘겨질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예상 밖의 마무리

평생 티격태격했던 엄마와 아버지. 지금은 엄마가 치매 걸린 아버지를 보살피고 있다. 무뚝뚝했던 경상도 사나이 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후 엄마에게 "여보야, 사랑해"라며 애교를 부린다. 제정신일 때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랑 고백을 치매에 걸린 후 듣고 있는 것이다. 노름으로 돈을 날린다며 평생 돈 한 푼 제대로 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모아둔 돈은 결국 몽땅 엄마 손에 들어갔다. 엄마는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따서 아버지를 보살피며 요양급여로 용돈까지 벌고 있는 중이다.


엄마는 내 인생의 스승

나도 한때는 엄마를 원망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내 나이보다도 어렸던 엄마가 저지른 실수들, 부족함들을 모두 용서한다. 엄마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엄마는 내 인생의 스승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이해하게 만들고, 내 길을 찾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렇게 엄마의 인생을 따라가며 나도 조금씩 철이 들어간다.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


주말에는 연재를 쉽니다.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이전 03화 호랑이 같은 엄마, 보살 같은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