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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Apr 15. 2021

커피 믹스의 두 얼굴

삶의 방편 그리고 의지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저 지각 아니에요, 2분이나 남았어요!” 


9시 출근, 아침마다 헐레벌떡 약국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숭고한 의식처럼 컵에 커피 믹스를 털어 넣고 물을 붓는다. 잠시 시간이 멈추고, 커피가 한 모금 목을 타고 넘어가고서야 비로소 시곗바늘도 제 갈 길을 간다. 


‘가만, 애들은 다 제대로 내려주고 왔나?’

‘가방은 다 챙겨줬지?’

‘숟가락은 넣었나?’

‘아유, 몰라.’


아이 넷이 아침마다 초등학교, 가정식 놀이방, 유치원을 겸하는 미술학원 그리고 어린이집에 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 곳을 정해 모두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여유롭게 준비하고 출발하리라는 잠자리에서의 다짐은 아침이 되면 웬걸, 늘 도루묵이었다. 엄마의 위험천만한 질주를 차마 솔직히 말할 수는 없어, 아침마다 우리는 하늘을 날아야 했다.

“얘들아, 꽉 잡아! 지금 막 날개 나왔어. 와! 난다, 난다! 꽉 잡아야 해!”

한동안 아이들은 우리 차가 정말 하늘을 난다고 믿었고, 선생님들께 자랑해 엄마를 난감하게도 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 “출근도 하기 전에 아침 먹은 것, 다 소화되겠네.”하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정말 그랬다. 출근과 동시에 내 몸은 에너지가 바닥났다는 경고음을 울렸다. 이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식처럼 타서 마셨던 커피 믹스 한잔은, 뭐랄까. 생명의 에너지였다. 갈색 커피 알갱이와 묘하게 균형을 이룬 흰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들어낸 소용돌이는 나를 최면에 빠뜨리곤 했다. 레드 썬, 그 순간 마음은 편안해지고 컵에서 느껴지는 온기 역시 몸의 에너지를 끌어올려 주었다. 


누군가는 그냥 설탕이 당을 채워줬기 때문이라 말했고, 누군가는 몸에 나쁘다며 걱정까지 얹었다.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12g의 커피 믹스 한 봉지 덕분에 나는 일터에서 충실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동료들과 따뜻한 농담을 나눌 여유가 생겼고, 환자들에게 위로를 건넬 에너지를 얻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내 몫을 다했다는 충만함으로 다시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200원 남짓한 이 가뿐한 커피 한 봉지야말로 생명의 에너지가 분명했다. 


드라마 아저씨에서 지안이 커피 믹스를 두 개씩 타서 마시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아직 어린 지안이가 짊어진 삶의 고단함이 전해져 얼마나 마음이 아팠나 모른다. 하지만 마냥 불쌍하지만은 않았다. 커피 믹스는 삶이 고단함을 알려주는 동시에, 그 삶을 살아내고 있음도 뜻하기 때문이다. 지안이 가진 삶의 의지가 커피 믹스를 통해 함께 전해졌다. 자신을 내팽개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지안이에게 ‘커피 믹스’가 살아가려는 방편인 동시에 살아가야겠다는 의지였듯, 그 시절 나에게도 ‘커피 믹스’는 그랬다. 고단한 육아와 가사와 일터에서의 노동을 위한 에너지 공급원이었던 동시에 잘 살아내겠다는 의지였다. 소중한 내 아이들과 더 많은 사랑을 나누고, 마찬가지로 소중한 나의 가치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커피 믹스’는 제 몫을 훌륭히 해냈다.

그리고 나도 내 몫을 훌륭히 해냈다.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아이들은 제각기, 알아서들 학교에 간다. 간혹 미리 말하지 않은 준비물로 소리를 높이기도 하지만, 십여 년 전과 같은 아침 풍경은 없다. 우리 차에서도 더는 날개가 나오지 않고, 나는 가끔 점심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커피 믹스를 계속 사고, 타고, 마신다. 


지금의 ‘커피 믹스’는 또 어떤 삶에서 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일까. 또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일까. 환경이 변하고 하고 싶은 일도 달라진다. 한 해 두 해, 나이도 들어간다. 버거운 일도 늘어가고, 신체적 변화들도 생긴다. 하지만, 내 삶을 내팽개치지 않겠다는 마음, 소중하게 다듬어가겠다는 그 마음만은 그대로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가득 담아 커피 믹스를 뜨겁게 탄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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