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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정 May 01. 2022

한글로 쓴 기제 축

50일 글쓰기 - 14

"임인년 음력 사월 일일 갑인일 갑인삭. 일 년 만에 돌아온 아버님의 기일을 맞아 불초소생, 가족들과 함께 부모님께 머리 숙여 인사 올립니다.

그리운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모두 먼 곳에서 평안하시길 간절히 기원하며 가족들의 정성을 모아 따뜻한 음식과 즐기시던 맑은술을 올립니다.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은혜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먼 곳에서 늘 지켜보시리라 믿으며,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간소한 음식이지만 기쁘게 흠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


시아버님 제사를 모셨다.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유세차'로 시작해 '상향'으로 끝나는 축문을 의미도 모른 채 외워 시험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 그때 축문은 글자로 쓰여 죽은 채 책 속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그 축문이 몸을 일으키고 가락에 실려 살아나 나에게 다가온 것은 결혼을 한 다음의 일이다. 제사 준비에 힘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게다. 하지만 준비의 고단함을 날려줄 만큼  좋았던 기억이 있었으니, 바로 시아버님께서 읽으시던 축문을 듣던 일이다.  

술을 한 잔 먼저 올리고 노래하듯 읊조리던 축문. 그 가락이 울려 퍼지면, 비로소 오늘의 제사를 준비한 이와 제사에 초대받은 이가 호명되고 만남이 성사된다.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아버님의 축문이 향 연기 사이로 유려하게 퍼져 나간다. 그리고 모두 마음을 모아 제사를 모신다.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이젠 남편이 축문을 읽는다. 다른 제사들은 남편도 아버님처럼 '유세차'로 시작해 '상향'으로 끝나는 축문을 읽는다. 그런데 유독 부모님 제사 때만큼은 한글로 축문을 쓴다. 남편의 목소리가 제사상을 휘감아 울려 퍼지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부모님을 향한 남편의 그리움이 나에게도 전해진다.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잘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애틋하다. 한문으로 쓰인 축문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시아버님의 축문에서도 이 같은 감정 느끼지는 못했었다.  


제사란 돌아가신 분의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우애와 정을 다지는 날이지 싶다. 각자 상황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돌아가신 분을 기릴 테지만, 혹여나 기회가 닿는다면 한문으로 쓰인 축문 대신 마음을 담은 한글 축문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 제사 준비로 하루 종일 고달팠던 몸과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며 함께 제사를 모시는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다정하게 대하게 되니 말이다. 필경 제사에 초대받아 오신 분 또한 기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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