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밤. 이미 시간은 새벽 한 시를 향하고 있다. 지구가 팔할이나 먹어버린 작은 달빛이지만, 그나마 그에 의지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를 따라 길을 나서겠소?”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눈길이 사뭇 진지하다. 그는 어쩌면 모든 것을 걸고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인지도 모른다.
“…”
잠시 내 시선은 그의 발을 향한다. 고무신…. 하얀 버선…. 이미 방향을 튼 그의 발에서 눈을 거두고 고개를 들어 다시 그 사람 얼굴을 찬찬히 살핀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걸었을까?
“내가 미덥지 못한 게요?”
초조한 목소리가 조급하게 달음박질한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덮은 장옷이 펄럭인다.
“전 제가 미덥지가 않습니다.”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지 그는 얼굴을 잠시 찡그린다. 그리고 들고 있던 불을 들어 올려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당신이 미덥지 않다니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등불을 들고 있는 그의 곱고 하얀 손에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잘 손질된 두루마기, 다시 버선, 그리고 고무신. 답답한 가슴을 크게 부풀려 나도 모르게 깊은숨을 몰아쉰다.
“나와 함께 가자 하실 줄 알았습니다.”
알아듣지 못한 듯, 그가 주름을 만들며 미간을 모은다.
“세상이 온통 어둠에 묻혀있다 한들 우리가 함께 손잡고 걷는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 당신의 등 뒤만 따라가야 한다면…. 당신의 그 고운 흰 손과 옷매무새가 거칠어지고 흐트러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내가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나를 감추고 나를 누르고 그림자처럼 살아가며 당신을 원망하면 어찌할지, 따라나선 나 자신을 미워하면 어찌할지…. 내가 도통 미덥지가 않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당혹감에 흔들린다.
“네, 당신은 나를 따라나서겠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지 따라나서고 싶지는 않답니다. 아, 사모하는 당신. 달이 기우는군요. 이제 돌아갈 시간이에요.”
나는 장옷을 여미며 한숨을 얹은 인사를 건넨다. 흔들리는 등불 아래 불안하게 서 있는 그를 남겨둔 채.
창외삼경세우시 窓外三更細雨時
양인심사양인지 兩人心事兩人知
삼경 깊은 밤 창밖에 가는 비 내리는데
두 사람의 마음이야 두 사람만이 알겠지.
두 사람의 마음이 사랑인지, 사랑이라면 어떤 모양새의 사랑인지…. 두 사람만이 안다. 이는 신윤복의 그림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리라.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덮어버린 밤처럼 사랑이라는 이름이 우리 삶의 질곡으로 다가오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