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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아 Mar 25. 2018

태백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봄이 오긴 오는구나 싶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태백은 겨울이 참, 많이도 길었다.

태백은 겨울이면 마치 어제 빨아둔 이불처럼 뽀얗고 깨끗한 모양을 보여준다.


어렸을 때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던 일은 마당에 쌓인 눈을 삽으로 퍼내는 일이었다.

아빠가 선발대로 눈을 한 삽 퍼서 길을 내주면 나는 그 길을 따라 장난치듯 눈을 양옆으로 퍼 날랐다.

손이 시린지 모르고,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지도 모르고 눈을 푸는 일.

어린 나에게 그것은 눈을 치우는 일이 아니라 아빠와 함께 노는 시간이었다.

꽤 오랫동안 눈을 치우고 나면 숨이 차오르는데, 그때 '후우우'하고 숨을 뱉어냈다가 공기를 한 움큼 들이마시면 온몸에 기분 좋은 찬 공기가 돈다.

그 찬 공기의 청량함은 이곳 서울에서도, 지금의 태백에서도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추억같은 것이다.

그때의 아빠와 나만 느낄 수 있었던 둘만의 공기인 셈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이 지났고 나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

서울에 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의 하나가 "태백은 어떤 곳이야?"이다.

나는 답한다."태백은 별거 없어요. 볼 것도 없고 이른 저녁만 돼도 불이 꺼지는 조용한 곳이에요"라고.

대화상대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겨울이면 집 앞 강가에서 이글루를 만들고 놀았던 것, 외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나무썰매를 타고 해가 질 때까지 놀았던 추억까지 펼쳐놓는다.


혼자 자취생활을 오래하다보니 서울에 집이 있어서 매일 가족들과 밥을 먹는게 당연하고 당연해서 외로움을 모르는 서울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태백이 집이라서 좋은 이유는 마음의 은신처가 있다는 것.  똑같은 일상이 지겨워지거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에 도저히 견딜 수 없을만큼 마음이 형편없을 때, 언제든 빈손으로 떠나 마음을 텅비우고 올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태백은 사람들이 가본 적 없는 작은 마을이고 겨울이면 눈이 지겹게 오는 추운 곳이지만요.

저에게는 한결같이 따뜻한 곳이에요.

태백은요, 겨울밤이면 별이 더 밝게 빛나고

겨울밤이면 더 생각나는 곳.

그 곳의 공기가 늘 그리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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