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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ke Hong Apr 18. 2023

애증의 툴, 매뉴얼

"무인양품은 90%가 구조다"

내가 일하면서 처음 경험한 매뉴얼은 해외 출장을 위한 준비 물품/주의점이 담긴 텍스트 파일 하나였다. 군복무를 대신해 병역 특례로 근무하던 회사에서, 먼저 근무하던 회사 선배가 본인이 겪은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작성하여 남겨준 것이다. 돌이켜 보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실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실수를 범하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무인양품은 90%가 구조다"를 읽으며 매뉴얼이 갖는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매뉴얼의 미덕

- 에이스가 가진 노하우의 전파

매뉴얼이 제 역할을 한다면, 회사 내에 존재하던 지혜를 모아 구성원 모두의 업무의 능력을 상향 평준화 시킬 수 있다. 에이스와 한 팀인 팀원은 에이스가 가진 업무 노하우를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고, 그것 만으로도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이 성장이지만, 항상 에이스들은 가장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고 바쁘며, 그들도 우리와 같이 24시간을 사는 존재이다. 따라서 에이스가 모두에게 가르침을 선사할 수 없고, 에이스의 최측근 몇몇만 은혜를 받게 된다. 매뉴얼이 에이스의 노하우를 담을 수 있다면, 이러한 물리적인 한계는 충분히 극복된다. 매뉴얼을 통해 모두가 에이스와 동일하게 일할 수 없을 지더라도 구성원 모두 일정한 단계까지 성장할 수 있다. 매뉴얼이 전달하는 노하우는 비본질적인 업무에 관한 지식과 본질적인 업무에 관한 지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 비본질적인 업무에 소비되는 시간과 노력의 최소화

매뉴얼을 사용하면 비본질적인 업무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새로운 업무에 투입된 순간 사소한 일도 고민하게 된다. 이 문서는 어디서 찾아야지? 이건 누구에게 요청해야지? 내가 이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너무 바보같이 보일까? 이런 사소한 고민이 업무 시간을 잡아먹고, 진짜 일의 시작은 한참 후에야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잘 작성된 매뉴얼이 있다면, 이런 고민을 최소화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


-추상적인 가치/품질에 대한 공감대 형성

매뉴얼은 만드는 과정, 매뉴얼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회사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품질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보게 된 원모먼트의 매뉴얼에 관한 글에서 매우 공감가는 문장이 있었다.


“플로리스트마다 배운 곳에 따라 다른 방식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꽃이 라는 상품이 정량적으로 측정이 되지 않는 상품이라 '예쁜 꽃다발'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제각각 이었습니다.”

우리 회사, 우리 팀이 생각하는 좋은 상품, 좋은 서비스는 무엇일까? 매우 간단하고 기본적인 질문인 것 같지만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생각보다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제공하는 상품/서비스 대부분이 품질을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글을 통해 객관화하고 정리하면서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상품/서비스를 구성하는 요소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할지 논의하고, 과거 사례를 정리하다 보면 분명 선명해지는 이미지가 있다.


그렇게 공감대가 형성되면 업무를 수행하는 커뮤니케이션 효율도 올라간다. 구성원 모두가 동일한 가치 기준을 가지고 상품/서비스를 판단하고, 하나의 언어를 모두가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다르더라도 고객에게 동일한 가치를 전달할 수 있으며 동일한 브랜드 가치가 형성된다. 이렇게 좋은 매뉴얼도 누군가 에게는 악몽같이 다가올 수 있다.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보았던 쓸모 없는 매뉴얼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매뉴얼은 마법의 은총알일까?

매뉴얼의 가장 큰 장점은 일의 저점을 평균적으로 높여준다는 것이다. 다만, 특수한 상황에서 상황에 맞게 나오는 대처하기 보다는 매뉴얼에 의존하게되어 일의 고점을 최고 수준까지 높이기는 힘들 수 있다. 일전에 업무 매뉴얼에 대해 부정적인 분과 대화를 해본적있다. 그 분은 매뉴얼이 구성원의 창의성을 제약하고, 교육과 소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고정된 매뉴얼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부정적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업무 특성이나 업종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기술의 발전 과정을 보면, 기계나 장치들이 너무 복잡하지 않은 고정된 규칙에 따라 동작하는 것에서 점점 상황이나 조건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동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성을 생각해보면 동작을 판단하는 프로세서의 발전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뉴얼 적용 여부도 결국 매뉴얼을 실행할 구성원이 어떠한 환경에서 일하는지 생각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구성원들의 평균 근속 기간이 짧다는 등의 이유로 장기간 교육이 어렵고, 근무지가 분산 되어 있어 지속적인 소통이 어려운 경우라면 장기간 교육과 소통을 통한 개개인 판단력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지속적으로 파트타임 직원의 도움이 필요하고, 업무 지역이 분산되어 있는 소매 체인이나 요식업 매장에서 특히 매뉴얼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 같다. 또한, 매번 다른 분야의 복잡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컨설팅 같은 분야에서 매뉴얼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 이유일 것 같다.


p.s.: 나에게 출장 매뉴얼을 주었던 선배는 이후 유니콘 기업을 창업했다. 매뉴얼을 만든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매뉴얼을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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