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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Oct 07. 2019

엄마의 계절은 벌써

나는 여름, 엄마는 가을 

나는 엄마가 좋았다. 엄마가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나처럼 학원에 안 가는 친구들이랑 실컷 놀다가 집에 와서 벨을 누르면 언제나 문을 열어주는 엄마가 좋았고 잠들기 무서운 밤에 손 꼭 잡아주던 엄마가 좋았다. 감기에 걸려 힘없이 누워있는 날에는 한 바가지 잔소리를 하고 나서 죽을 끓여주는 것도 좋았다. 내 감정선은 널뛰는 법 밖에 모르는데 엄마의 감정선은 잔잔하게 유지돼서 좋았다. 


내가 가난에 시무룩해할 때도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는 악착같은 생활력으로 나의 학업에 필요한 돈을 댔다. 엄마는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는 내가 숨어들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동방신기 덕질과 책에 빠져있을 때 날 보던 엄마는 꽃샘추위였지만 다른 날들은 봄바람 같았다.      


성인이 되고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건 돌아올 집이 있어서였고, 집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가족이 있음을 알아서였다. 마음이 힘들 때면 떠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내게 그렇게 예민해서 세상 어떻게 사냐며 굳건한 멘털을 자랑하던 엄마는 갱년기라는 무더운 여름을 겪기 시작했다. 갑자기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얼굴과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한 몸 때문에 엄마의 감정은 극과 극을 달렸다. 나는 엄마를 위해 창문과 베란다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고 석류즙을 달마다 주문했다. 별 거 아닌 일로 수없이 다투고 나서야 엄마의 여름은 끝을 향했다.      


운동 거부! 를 외치는 엄마를 이끌고 산책을 핑계로 동네 한 바퀴를 하던 날, 엄마는 ‘다리 아프다. 천천히 좀 가자.’고 말했다. 원래 우리 집은 아빠가 꾸물꾸물 느리고 엄마는 성격이 급해서 걸음도 빠르다. 엄마 속도를 맞춘다고 나와 동생은 ‘엄마, 쫌! 천천히 가자~’고 말하곤 했다. 그런 엄마의 입에서 나온 천천히는 너무도 생소해서 내 속도로 걷다가 천천히라는 말을 몇 번 듣고서야 걸음을 늦출 수 있었다. 



청춘은 푸른 봄이라던데 봄은 어디로 가고 나는 푸르지도 않고 푸르뎅뎅하기만 했다. 생각이 많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뭐 하나 되는 건 없고, 최선을 다하고 나면 허무했다. 내가 나를 아파하는 동안 엄마의 계절이 예전보다 빨리 지나가고 있음을 몰랐다. 엄마의 계절은 벌써 가을이었다. 예전과 달리 가득 찬 여행 일정에 힘들어하던 때부터였을까, 겁내지 않던 것들이 겁난다고 했던 날부터였을까. 아니면 아빠와 동시에 아프기 시작한 무릎 통증과 근육이 빠지며 얇아지던 종아리가 시작이었을까. 엄마의 가을은 언제 시작한 걸까.      


하늘은 자꾸 높아져서 기분이 붕~뜨고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어 질 때 나는 가을이 찾아왔다는 걸 깨닫곤 한다. 삶은 밤이 먹어싶어 지고, 단풍에 마음이 울렁이다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마음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겨울 다음으로 사랑하는 계절.      


때로는 어떻게 나한테! 싶게 밉고 때로는 많은 포기를 감당해야 해서 나를 슬프게 만들고, 때로는 말할 수 없게 좋은 ‘엄마’의 계절을 되돌릴 수 없기에 나는 아직 가을이 지나가지 않았음을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친구와의 약속과 모임, 언어 수업으로 가득 찬 스케줄에 하루만큼은 엄마를 위해 비워두면서 나는 매일 바라고 있다. 엄마의 가을은 쓸쓸함 대신 나의 애정에 발갛게 물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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