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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Nov 25. 2019

하찮은 직업에 대하여

4년제 대학과 커피 타기 면제권 

희망직종 포기. 주 5일 포기. 다음에는 뭘 버려야 할까. 취업이 안 되고 백수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내 나름의 기준들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한다. ‘나 퇴사했어.’ 큰마음먹고 집에 퇴사 통보를 했던 저녁식사 자리에서 들은 건 아빠의 해고 소식이었다. 나는 준비하던 워킹홀리데이를 영원히 준비상태로 두고 다시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취업, 사실 쉬울 줄 알았다. 자신만만하게 전에 일했던 직종만 클릭해서 채용공고를 봤는데 10월은 채용시즌이 아니어서 일자리가 없었고, 남은 공고라곤 틈만 나면 사람이 나와서 내내 상단에 떠있는 회사뿐이었다. 결국 직종 무관으로 여기저기 지원했지만 면접 연락이 오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좋다, 주 5일도 포기하자. 토요일 근무까지 포함해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냈다.      


얼마 뒤, 면접 연락이 왔다. 작은 규모의 회사였고 면접은 사무실 앞쪽에 놓인 소파에 앉아 진행됐다. 면접 중간중간 회사에 온 손님들이 면접관과 나를 힐끔대며 지나갔다. 면접관과 나 사이에 익숙한 질문이 오가고 시간이 꽤 흘렀을 즈음, 그분은 거래처 손님에게 커피를 타 줘야 할 때가 있는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커피는 셀프가 모토지만 먹고사는 것 앞에서 가릴 게 없던 나는 괜찮다고,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내 대답에 그분은 이력서를 찬찬히 살피시더니 아깝지 않으냐고 물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빤히 봤더니 면접관은 예의 그 차분한 톤으로 말했다. ‘이 전공이면 공부도 많이 했을 거고, 관련 실습도 계속 해왔던데. 여기서 일하면 그동안 해온 게 아깝지 않겠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중에 여유가 되면, 그때 더 공부해 보려고요. 지금은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면서 많은 생각이 밀려왔다.


채용공고에 고졸 이상이라고 적힌 곳은 딱 고등학교 졸업장만 가진 사람을 원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일을 맡기엔 학력이 높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고졸이 하는 일을 ‘이런 일’로 칭했다. 배운 애들 써먹었다가 따박따박 따지고 들면 피곤하다는 우스갯소리는 웃자고 한 말이 아니었구나. 그러니까 나는, 4년제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커피를 타는 일을 면제받는 걸까.     




대학 진학을 안 하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친구가 사회초년생일 때 당한 많은 무시와 눈초리가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고졸은 거래처 사람들의 무시도, 커피를 타는 것도 감당해야 하는 거라는 암묵적인 기준. 직업훈련 부서 및 관련 정부기관에서는 학력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 능력 중심의 사회를 만든다고 했지만, 정작 사회에서는 학력과 나이에 따라 할 수 있는 일과 견뎌야 하는 일이 계급처럼 나눠졌다. 정말 학력이 필요한 전문 직종(의사, 간호사 등) 보다 그렇지 않은 직종에서의 계급 나누기가 훨씬 빈번하다는 걸, 직종 무관으로 여러 곳의 면접을 보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세상에는 무시해도 될 만한 작고, 하찮은 직업이 존재했다. 보이지 않는 선은 보통 사이에서도 보통 상과 보통 하를 갈랐다.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서류업무로 공공기관에 방문하던 사무원을 무시하던 사람, 그래도 4년제 나왔는데 2년제가 우리만큼 받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칼 같이 선을 긋던 사람. 내 업무는 고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행정부서 지원자는 4년제 이상만 받으라던 인사담당자. 숫자와 가르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알바생이기도 했고, 직장인이기도 했고, 백수이기도 했던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느 위치에도 있어봤기에 알게 됐다. 누군가가 가볍게 밟는 낮고 작은 일자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의 인생 또한 하나뿐인 ‘삶’이며, 어떤 삶도 무시당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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