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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Mar 21. 2020

드라마라는 구원

드라마 작가님들 사랑합니다~:)

어쩌면 신은, 내게 거창한 격언이나 훌륭한 스승 대신 드라마를 줬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용이 뭔 지 기억도 안 나는 드라마 <인어아가씨>의 마지막 회를 두고 반 아이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던 초등학교 6학년 때가 나와 드라마의 첫 만남이었다.      


10대 시절, 달 보고 하교하는 게 익숙했던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것도 드라마였다. 지금 보면 저걸 도대체 왜 봤나 싶은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를 보려고 수, 목요일마다 땡땡이를 쳤다. 모두 야자하고 있을 시간에 볼륨을 한껏 높여서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으며 한 번도 들키지 않고 막방까지 봤다. 전교 등수로 끊기는 심화반 학생이 설마 땡땡이를 칠까 싶어 감독 선생님이 오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그건 드라마 보기 아주 좋은 기회였다. (심화반 친구들에게 나 간다! 인사하고 후다닥 가방 챙기던 기분이 얼마나 짜릿하고 좋던지.)    

  

10대 시절이 지나고, 인생이 내리막길로 치닫던 매 순간마다 브레이크처럼 드라마가 등장했다. 첫 직장에서 일 뿐만 아니라 조직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어서 퇴사 생각만 나던 때. 다시 출근하자고 마음먹게 한 건 tvn에서 방영하는 <시그널>때문이었다. 자기 일에 열심인 형사들의 모습이 멋있어서, 회가 거듭될수록 설렜다가 마음 아팠다가 감정의 널뛰기를 겪으며 회사 생활을 버텼다.     

 

어느 날엔 친구 J의 추천으로 <시카고 타자기>를 만났다. 버티기로 정의되는 사회생활을 지속하면서 다 놓고 싶던 때였다. 그래도 중간은 될 줄 알았던 내 위치가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층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의 무력감과 불안함으로 한순간도 편안함을 느껴본 적 없던 그 시절 일기장에는 종종 시카고 타자기가 등장했다. 시카고 타자기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다. 그런다고 독립이 오겠냐 싶은 시대에 독립을 외치는 바보 같은 묵묵함이 친한 친구에게도 말 못 하고 끙끙대던 불안하고 우울한 내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부모님 반대로 퇴사가 좌절되고 대학원도 좌절됐던 겨울의 끝 무렵에는 <열혈사제>를 만났다. 이름만 알던 김남길 덕질을 시작케 했던 드라마. ‘이제 연기는 그만할까?’, ‘연기 말고 다른 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진 배우들이 모여 만들어낸 절박함 때문인지 등장인물들이 동네에 있을 법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연기를 잘해줘서 매 회 마음이 뭉클했었다.      


출처 -SBS 열혈사제


곧 벚꽃이 피면 김해일 신부가 생각나겠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던 사람. 김해일은 내게 용서를 알려준 인물이었다. 국정원 요원 시절. 작전 수행 중 수류탄을 던진 곳에 어린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완전히 무너졌다. 골목길에서 반죽음 상태로 널브러진 그를 발견한 신부님 덕분에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진정한 사제가 되어가는 모든 순간이 눈부시고 아파서 잊을 수 없다. 


드라마를 보면서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아프게 해서 마음의 짐을 진 것 같은 순간을 떠올렸고,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던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그를 보면서 지난날의 나를 용서했고, 또 용서하지 않을 거라던 이들을 용서했다. 그가 그러했듯이 아주 어렵고 긴 시간을 지나서.      




시그널, 시카고 타자기, 열혈사제 등. 일상에서도 불쑥불쑥 떠올라서 나의 힘듦과 무기력함을 잊게 했던 드라마는 마음속 나쁜 늑대와 착한 늑대 중에서 착한 늑대에게 먹이를 던지는 독한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포기할 법 한데, 그만둘 법 한데 끝까지 ‘선’을 추구하는 사람. 사회가 어떤 곳인지 잘 아는 나는 사회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선한 독종들이 주는 뻔하디 뻔한 성장기에 매번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와 달리 16부작에서 24부작까지 꽤 긴 호흡을 가진다는 점도 좋았다. 몇 달 동안 천천히 내 마음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는 게 무서워서 어디 숨어버리고 싶던 마음이 마지막 화를 볼 때면 원하는 걸 하면서 살아남고 말 거라는 용기와 동기부여로 바뀌곤 했다.     


김해일에게 이영준 신부님이 구원이었듯이 내게는 드라마가 구원이었다. 좋아하는 책 보다 훌륭한 스승의 조언보다 드라마가 주는 힘과 위로가 더 컸다. 주인공에 같이 감정 이입해서 나아가는 두 달 남짓한 시간을 통해 때로는 통쾌함을 느끼며 대리만족하고, 때로는 성장하고 때로는 설렜다. 앞으로도 다가올 인생의 내리막길마다 어김없이 드라마가 등장할 거고 드라마는 위기의 순간, 내 구원이 될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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