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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Jul 13. 2020

책을 왜 읽어?

내가 잡은 동아줄은, 책이어서.

설 : 팍팍한 세상, 매달릴 게 책밖에 없어서요.

세주 : 나도 개 같은 인생, 매달릴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설 : 인생이.... 그랬어요?

세주 : 그래요 지금도. 

설 : 그래서 잡은 지푸라기가 소설이에요?

세주 : 지푸라기치곤 폼 나잖아요. 언제 배신할지 모를 남의 손잡는 거보단 안전하고, 

매달려도 비굴해 보이지 않고, 약물 없이도 현실도피 가능하고. 운 좋으면 돈도 되고.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中     



드라마의 한 장면에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마음이 훅, 내려앉았다. 내가 책을 잡은 이유가 그랬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할 타인은 없다. 내 인생을 그대로 살아보지 않은 이상. 팍팍하고 겁나는 세상 앞에서 내가 잡고 안심했던 동아줄은, 책이었다.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쉬


초, 중학생 때 어린이/청소년용 명작소설(폭풍의 언덕, 제인에어 등)에 빠져서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덕질에 빠진 고등학생 때는 새벽까지 전자사전을 충전시켜 팬픽을 읽었다. 엄마는 제발 책 읽을 시간에 공부 좀 하라고 했고, 수업시간에 책을 읽다가 선생님께 빼앗긴 나는 읽던 책을 가져간 선생님을 미워했다. 뻔뻔하게도.   

   

책에 관심 없는 친구들은 도대체 저걸 왜 죽어라 읽는 걸까 하는 신기함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겠다. 그저 재미있다는 한마디는 가볍고, 삶에 의미를 붙이는 건 너무 묵직하다. 책과 나의 긴 시간은 어떤 이유를 붙이기엔 너무 익숙해진 습관과 같아서 읽고 쓰지 않는 날이 길어지면 일상이 무너진 것 같다.


남들은 다 잘한다는 사회생활을 못 버티고 백수가 됐을 때. 이제 좀 살만한가 싶었는데 가난이 덮쳐올 때. 밍밍한 일상에 안도하다가 불쑥 잊고 있던 꿈이 생각나서 한도 끝도 없이 씁쓸해질 때. 나조차도 내가 한심해지는 매 순간.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 이어지는 삶이라는 걸 멈출 수 있으면 잠시 멈추고 싶을 만큼 마음이 무너질 때, 나는 책이라는 도피처를 택했다.     


마음이 힘들 때는 에세이, 청소년 소설,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를 읽었다. 만들어진 이야기 안에서 울고 웃으며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두려움을 까먹기로 결심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 한 주, 한 달 연장되던 생은 이제 긴 줄을 이어 살고 싶게 했다. 기분 좋고, 지루할 정도로 일상이 평온할 날에는 인문학과 철학 서적을 읽었다. 괜히 철학자가 아니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맞는 말 같아. 돈 버는 데는 1도 도움이 안 될 가치와 나의 내면과 인류애까지 끄집어내서 생각으로 하루를 꽉, 꽉 채우며 나는 나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현실도피로 택한 책이 지나간 자리에는 현실을 마주 보라는 책이 가만히 자리 잡았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읽어가면서 나는 현실에 두 발 붙이고 서는 법을 배운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할 수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필요한 인간의 모순과 신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게 꽤나, 재밌다.   

       

각종 영상과 양질의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왜 아직도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좋아서.라는 대답 밖에는 내놓을 말이 없다. 앞으로도 누군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이야기 더미를 놓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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