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어야만 하는 이유
“책을 읽다가 자꾸 멈춰요.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분명 청중들은 안 멈추고 계속 읽고 싶은 마음에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멈추게 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난 이렇게 답하곤 한다. 멈출 수 있어 너무 좋다고, 잘했다고. 강연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많은 이들이 책에 뜻이 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왜 좋은 지도 알고,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있다. 다만 막상 손이 가지 않고 읽어나가기가 힘들 뿐이다.
책이 너무 쓸데없이 권위를 가진 게 아닐까. 무엇이든 주로 책에서 배워 버릇해서인지 난 작가는 다 멋지고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다. 물론 내가 작가가 돼보고 나니 그 환상은 와르르 무너졌지만. 책을 써도 난 똑같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다. 나와 달리 됨됨이도 훌륭한 분들이 너무나 많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는 인간일 뿐이다. 작가가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친구와 대화를 할 뿐이라고 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편하게 다가가면 한 줄만 읽어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이니 꽤 멋진 일이 된다.
무엇보다 멈추면 어떤가. 몇 시간씩 그 친구만 쳐다보며 웬 종일 대화만 하는 일은 현실에서도 어렵다. 흥미가 떨어져서 멈추게 된다면 그 책과 지금 현재 결이 맞지 않는 것이고(나중에 다시 읽어볼 수 있기를), 졸려서 멈추고 잠들게 되었다면 자면 된다. 그만큼이 내가 하루에 최소한으로 읽을 수 있는 분량인 것이다. 하루에 꼭 많은 책을 읽어야 할까? 많이 읽기만 하면 좋은 걸까? 독서를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이지만 책과 친해지는 것이 먼저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생명체의 특권이다. 책은 친구니까.
또 정보 습득을 위해서라면 꼭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보다 효과적인 수많은 매체들이 있다. TV 프로그램들은 물론 유튜브에도 재미있고 유익한 영상들이 정말 많다. 재미나 시각적 즐거움 외에도 정보 전달에 있어서도 매우 효율적이다. 영상으로는 카메라 앵글이 한번 돌아가는 3초 만에 배경을 보여주지만 소설로 바뀌면 5쪽 이상 할애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소설이 원작인 작품을 먼저 읽고 영화화된 작품들을 보고 누군가는 종종 실망하곤 한다. 감독의 실수인가? CG가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난 그 이유가 상상 때문이라 생각한다.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행간에 자신만의 상상을 집어넣어 머릿속에 무언가를 그리게 된다. 그것이 독서의 매력이자 재미다. 영화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멋지면 감탄이 일고 상상보다 덜 멋지다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은 활자라는 대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주체적인 활동이다. 능동적으로 사고하는 매우 주도적인 매체가 책이다. 멈춰져 있는 추상적인 관념을 다시 머릿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생각이 반영된다. 그렇기에 저절로 멈추게 되지만 멈추었기에 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된다. 너무나 쉽게 멈춰서 다시 그 부분에서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형체가 없는 것을 형체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고 형체가 있는 것을 다시 나만의 색깔로 덩어리로 만들어내는 것. 그 과정이 반복될 때 나다운 삶을 살게 된다.
반면 넷플릭스에 들어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끝날 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 복잡한 사고 과정을 동반하지 않은 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안한 일이다. 러닝타임 내내 흡입력 있게 끌고 가는 힘이 영상 제작자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다는 것은 끌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종종 그냥 끌려가고만 싶고 쉬고 싶어 영화를 볼 때도 있다. 다만 편안하기에 한없이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된다.
지금처럼 미디어 중독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어릴 때‘TV는 바보상자’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송국에서 짠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8시엔 세계명작동화 하는 날이니 일요일 8시엔 꼭 일어나야 해. 밥 아저씨가 나오는 4시에는 EBS를 봐야지. 축구왕 슛돌이와 피구왕 통키를 하는 3시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주인은 TV였다.
복잡한 사고 과정을 동반하지 않은 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안한 일이다. 바보를 ‘나만의 생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친다면 TV는 바보상자가 맞다. 그러니 영상물도 중간에 끊어보며 멈추어 생각을 하면서 보면 바보상자가 아니라 똑똑 상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정지 버튼 한번 누르는 게 뭐가 어렵나 싶지만 움직이고 있는 무언가를 멈추는 일은 보다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또 움직이는 공보다 정지상태인 공을 쳐 멀리 내보내는 것은 훨씬 어렵다. 독서는 그 어려운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VOD 서비스로 인해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고르고 볼 수 있는 시대다. 내가 무엇을 볼지 선호하는 것. 그중에서 지금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행위 역시 능동적인 사고의 개입이 들어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책꽂이에서 책을 뽑아 내 반경 안에 두는 것부터가 독서다.
틀어놓으면 계속 내가 원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흘러나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데 원하는 게 나온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소비자들은 무언가를 보기 전까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 멈출 필요가 있다. 진짜 내 생각을 보다 깊은 곳에서 꺼내기 위해서는 멈출 수 있는 책을 읽어야만 한다.
카프카의 말처럼 책은 도끼다.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처럼 책도 수많은 종류가 있지만 어떤 종류의 도끼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얼어붙은 마음과 생각을 깨부수고 심원의 보물을 캐 낼 수만 있다면 다 좋다. 그렇게 캐낸 보물들로 마음속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 요리조리 조합하여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책을 읽고 잠시 멈춰도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