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로 떠나보낸 나의 연인에게
"네가 내 옆에 평생 있을 것만 같았어."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예전 남친이 내게 했던 말. 갑자기 왜 그러냐고 당황스럽다고 연거푸 말했더랬다. 얼마 안 된 일인 것 같은데 벌써 15년이 다 넘은 일이라니. 하긴 젊은 날의 추억은 대부분 20년이 되어버린 ‘진짜’ 중년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고?”
기가 막혔다. 그거야말로 나에 대한 무관심을 증명하는 것 같은데. 진즉에 잘하지 그랬어. 계속 말했잖아, 힘들다고.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다고.
모든 일이 갑자기 일어나진 않는 법, 언제나 전조증상은 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상대에게 무관심했을 뿐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공기처럼 눈에 띄지 않게 곁에 있어주었으니까. 언제까지나 지금 같을 줄 알았을 거다. ‘이별 통보' 후에야 진짜 떠났다는 현실을 깨닫는 사람의 마음이란. 그도 그때 힘들었겠구나.
나이 먹고 갑자기 웬 연애 드립? 급 소환한 옛 연인에게 미안하지만, 이별 장면이 뭐가 이리 똑같은 지 희한해서 순간 불륜 막장드라마를 쓸 뻔했다. 네, 전 지금 ‘건강’과 헤어졌어요. 사람은 왜 꼭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걸까? 건강을 잃고 나니 좋았던 몸 상태가 너무나 그립다.
일방적으로 떠나간 그 상대는 건강했던 몸.
이별의 원인은 그를 무관심, 함부로 대함.
그로 인해 내가 맞이한 고통의 이름은 목 디스크.
미리 준비할 시간을 줬다면 이런 파국으로까지 치닫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텐데.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니. 중간중간 아팠던 적이야 당연히 많았지만 디스크는 난생처음이다. 검지와 엄지손가락 끝이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저릿저릿하다. 물혹으로 인한 손목의 통증이야 예전부터 있었지만 그건 비할 바가 아니다. 팔꿈치가 쑤시고 저리고, 견갑골 주변과 어깨의 근육들은 물론 두통까지. 아직 젊은데 왠지 종합병원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이건 내가 원했던 노후의 모습이 아닌데. 은발 단발머리를 휘날리는 웃음 가득한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고.
방사통과 연관통이라 불리는 이 통증들이 실연의 아픔처럼 갑자기 훅 찾아왔다. 디스크 환우님들, 모두들 이렇게 아프셨던 건가요. 24시간, 48시간 아니 멈추지 않는 고통이 입덧에 버금간다. 아팠다가 잠깐은 그래도 멈춰줘야 뭔가 일상생활을 영위해 갈 텐데 너무한 건 아닌가 디스크 자네.
사실 영원히 안 아플 줄 알았다. 아니 아플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디스크 같은 병명으로 찌릿찌릿함을 느끼고, 몸의 이런 부분들이 아플 거라는 건 전혀 짐작도 못했다. 손가락과 팔꿈치가 아픈 게 이 정도로 힘들 줄이야. 항상 멀쩡한 상태로 있어주어 소중한 줄 몰랐다. 그냥 당연히 움직이는 줄 알았고, 보호하거나 아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이 소중한 손가락으로 수많은 일들을 함께 해왔는데 이 감사한 존재에게 난 무얼 한 걸까. 저릿저릿 안 하는 순간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언제까지 아픈 걸까.
잠깐 아프고 약만 먹고 금세 나을 것 같은 고통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병원 가고 말았겠지. 다행히 실연의 아픔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오래도록 계속되기에 모든 것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데려오고 싶은 소중한 연인이니까. 사랑을 제대로 표현해서 내 곁에 평생토록 머물고 싶어 하도록.
게리 채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에는 5가지로 범주화한_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_사랑의 표현방식이 나온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커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나아가 사람마다 제1의 언어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5가지 방식 모두를 느껴야 온전히 사랑한다고 느낀다. 결국 표현하거나 노력하지 않고 유지되는 사랑은 없다는 걸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돌이켜보면 상대는 어떤지 알아보려 하기도 전에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만 사랑을 표현하게 되는 것 같다.
가족은 물론 자녀에게 적용시켰던 ‘사랑의 언어’를 이젠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나이가 되었다. 심신 모두 이제 일할만큼 일해서일까. 막무가내의 사랑고백을 인내심 있게 받아줄 여유는 없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려 깊지 않은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떠나간 내 연인, 사랑이 부족하다고 소리치는데 왜 난 하나도 몰라준 걸까. 그가 원했던 사랑 표현 방식은 평상시의 생활습관, 태도였음을 왜 몰랐을까. 스스로를 진짜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방치한 내 몸은 생각과 전혀 달랐다.
젊은 날의 나는 내 연인 ‘건강’의 제1의 언어가 잠인 줄 알았고 잠만 잘 자면 다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누구나 변하듯이 그도 변했다. 내가 좋자고 하는 운동, 순간의 맛에 혹해 넘겨버린 소화기관을 배려하지 않은 수많은 음식들. 푹신하게 기댄 채로 뒹굴거리던 수많은 시간들. 그동안의 내 건강상태는 아직도 20살 사랑 표현 방식을 억지로 받아주고 있을 뿐이었다. 평상시에 함부로 대해놓고 이벤트로 선물 사주고, 갑자기 달콤한 말 해주고, 이런다고 사랑을 느낄 리가 없지. 정말 몰랐다. 날 떠나버린 게 당연하다. 바른 자세, 운동, 수면, 식사, 조용한 시간. 그가 다시 돌아오면 꼭 지키고 싶은 사랑의 언어 5가지. 내가 또 놓치고 있는 게 있을까. 진짜 사랑을 아프고야 배운다.
아파야 성장하는 법, 아파야 산다. 누군가는 정말 아파야 살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기에 그렇게 무의식 중에 아프다지만, 난 말 그대로 아팠기 때문에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아파서 속상한데 한편으로는 기쁘다니. 이 아이러니함에 기가 막히지만, 당장 죽을병에 걸린 것이 아님에 감사하고, 아프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아파서 불안한 게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아픔을 느껴서 괜찮다는 안심이다. 불안에 이끌려 온갖 상술로 인한 치료와 약물에 허우적대지 않고, 방치해온 나쁜 생활 태도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감사한다.
내가 원하는 수많은 성과와 결과물들은 건강할 때 다음을 기약한다. 가장 선행되는 건강한 몸과 마음 상태에 집중하기. 쓰기 위해 건강을 관리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매 순간 바로잡기. 한없이 나를 망가지게 만들었던 편하지만 중독성 있던 썸 타는 그대들은 이제 안녕. ‘자기 파괴적 습관’을 못 놓는 문어발 다리, 어장관리 그만하고 내게 소중한 인연 딱 하나만 지키도록.
사랑하는 그대여. 건강이라는 이름의 나의 연인. 정말 떠나버려서 회복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잠시 시간을 갖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평생 당신 없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야. 그동안 한 번도 감사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덕분에 당연히 여러 일들을 해왔고 당연히 잠을 잘 잤고 당연히 앉고 서는 것에 불편함이 없었지. 일상적인 그 수많은 일들이 이렇게나 소중하고 감사할 줄은 정말 몰랐어. 그동안 곁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다시 돌아와만 준다면 앞으로는 더 나빠지지 않게 정말 노력할게. 그래서!! 내겐 안 돌아와 줄 거니. 가망은 없는 거니. 이제 내가 정말 잘할게. 질척거리며 매달려본다. 제발 내게 다시 돌아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