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진짜 공부 중
마지막 순간
제갈소정
화가 ‘니글(niggle)’에게는 죽기 전에 그려내고 싶은 그림이 있었다.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 한 그루였다. 나무 뒤쪽으로 펼쳐진 멋진 세계까지 상상하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할 만큼 커다란 캔버스를 준비했다. 떠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이 그림 한 폭 만큼은 그려내고 말겠다며 열심히 작업을 했지만, 이파리 하나 외에 캔버스 위에 표현된 이미지는 거의 없었다. 결국 니글은 꿈꾸던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엉엉 울며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지나 낡아버린 채로 발견된 그의 미완성 작품은 ‘잎사귀’라는 이름으로 마을 박물관의 후미진 구석에 걸려있게 되었다.
<니글의 이파리>라는 위 단편은 작가 존 로널드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던 당시, 평생을 바친 작품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던 때 썼던 글이다. 톨킨은 여태 세상이 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써내겠다는 비전으로 가상 속 여러 나라들의 문화 및 언어는 물론 수천 년에 걸친 역사를 만들어왔다. 부차적으로 수없이 뻗어나가는 줄거리들을 만족스럽게 마무리 짓기란 쉽지 않았고 그의 정신적 에너지와 창의력은 고갈되어갔다. 깨작거리거나, 사소한 것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 ‘니글(niggle)’은 주인공의 이름이자 바로 톨킨 그 자신이었다.
우리 모두에게서 니글을 본다. 처음에는 큰 그림을 꿈꾸며 시작하지만, 정작 현실속에서 시시하고 소소한 일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실망하기도 한다. 이런 거나 하려고 그 고생을 했나 싶고, 이러려고 꿈을 키워온 건 아닌데, 결국 내 힘으로는 온전히 그 비전을 이루지도 못할 것 같아 낙심한다. 그러나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꿈은 성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며 자신을 성숙하게 만드는데 그 존재 의의가 있다. 이 의미에 충실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종착역인 죽음은 슬프고도 두렵다. 하지만 그래서 겸허해진다. 불필요한 욕심을 거둔 채 본질에 집중할 수 있게 하며, 시시한 것들도 기적임을 깨닫는 선물도 받을 수 있다.
앞선 니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니글은 하늘나라의 높은 산들로 가는 열차에 태워졌고, 그 끝에서 꿈꾸던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평생토록 상상해온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름답게 완성된 모습이었다. 죽기 전에 살았던 세상은 니글과 미완성 작품을 완전히 잊다시피 했었다. 그러나 톨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그래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실제로 톨킨 역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통과하는 니글에 스스로를 투영하며 위안 받았고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대작을 남기려는 욕심을 버린 채, 이야기로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채워주는 본질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임종연습’이나, 유태인들의 ‘생전유서’ 혹은 위인들의 ‘묘비명’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우리 삶이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조금이라도 일으켰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소중한 이에게 사랑을 전하고 내 삶의 진심어린 목적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그대는 오늘도 꽤 멋진 ‘진짜 공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