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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아지트 Oct 06. 2023

어느 '차도녀'의 이중생활

내 안의 '블루독' 이야기 8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차도녀’ 같아서 가까이 오기 힘들었다고 한다. ‘차도녀’는 차가운 도시여자의 준말이다. 나는 그말을 들을 때 기분이 묘하다. ‘차가운’에 focus를 맞추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수련을 하고 내 안의  따스함을

계발하려고 애를 썼는데,  여전히 나를 차갑게 보네...’하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도시여자’에 focus를 맞추면 '앗...나...촌년인데...나를 세련된 사람이라고 봐주네...’하는 기분좋은 안도감이 느껴진다.      


실제로 결혼 전, 대학시절에는 압구정동에 살았다. 그 시절 가장 핫했던 ‘압구정동’에서 살았지만, 로데오 거리를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아니, 가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 정문앞에 내려주는 버스정류장이 그곳에 있어서 현대백화점 앞에는 매일 갔었지만, 현대백화점 안에 들어가서 쇼핑을 할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었다. 백화점은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 그냥 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다. 사람사는 곳에 백화점이 있는 것당연한 줄 알았다. 결혼 이후 내가 그 도시를 떠날 것임을 알았더라면 서울을 그렇게 소홀히 여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훗날 백화점 입구에서 화려한 조명이 너무 반가와, 눈물 왈칵 쏟아져나올 날이 올 것을 알았더라면... 현대백화점을 버스정류장으로만 여기고 살진 않았을 것 같다.     


그렇게 압구정동에 살며, 매일 현대백화점 앞에 가던 나의 별명은 오히려 ‘촌년’이었다. 엄마는 나를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불렀다. 엄마가 자기 취향대로 사와서 입혀주는 옷이 세련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차라리 중고등학교때 교복을 입을 때가 편했다.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 가고나니 '여대생이 그렇게 입고 밖에 나갈거니?! 옷갈아입고 가라!’ 아침마다 복장검사에 걸리지 않으려 진땀을 빼야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누군가 나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을까...’ 하고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그 시절 나는 외모에 자신감도 없었고 우울했다. 그래서 차가운 여자로 보였을 수 있다. 그 ‘도시’에서 나는 본의 아니게 ‘차도녀’로 살았었다.      


결혼후에 나는 엄마의 예언대로(?) 진짜 촌년이 되었다. 남편의 직장이 바뀔 때마다 시골에서 시골로 옮겨다니며 살았다. 내가 사는 곳 주소에 ‘읍, 면, 리’가 붙었다. 백화점 옆에 살때는 백화점에 관심도 없던 내가, 백화점이 없는 곳에서 살다보니 백화점 병에 걸리고 말았다. 가로등조차 별로 없는 시골에서 살다보니 명절에 한번씩 보게되는 한강다리의 화려한 조명에도 눈물이 났었더랬다.    


이런 나를 ‘차도녀’라고 불러주다니...     


현대 정신분석가들은 ‘자기표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린 시절 대상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따라 ‘나는 이런 존재구나...’하는 표상을 형성하는데, 그 시절의 자기표상은 매우 깊은 뿌리가 되어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나의 중요한 대상으로부터 ‘촌년’이라는 명명를 받고 나는 그 명명된대로 도시 한복판에서도 ‘촌년’으로 살았다. 그 ‘촌년’이라는 부정적 자기표상은 ‘촌’에 가서도 ‘사람들이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네...’라는 자기인식으로 위축되게 다. '촌년'인데 촌에 사는게 너무나 불편했다. 제대로 촌년으로 살지도 못했다.


‘엄마는 정말 못말리는 딸뻑녀(딸한테 뻑간 여자)야~’ 딸이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실제로 딸은 ‘사천면 방동리’에서 자랐지만 자기 스스로를 ‘나는 촌년이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자기가 자연 속에서 자라서 너무 좋았고, 학업스트레스도 크지 않게 자란거 같다고 자부심이 큰 아이다.     

 

결혼 전부터 결심했었다. ‘나는 결혼하면, 무조건 딸을 낳을거야. 딸이 태어나면 최선을 다해서 이뻐해줄거야...’ 내 결심은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한 것 같다. 가끔 딸에게 ‘엄마는 내가 그렇게 좋아? 내가 그렇게 이뻐?’라는 말이 참 고맙게 들린다. 촌에서 살았는데도 스스로에게  ‘나는 촌년이야’이라는 부정적 표상을 가지지 않고 자라준게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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