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돌봐야 할 이유
“어떤 감정은,
그 사람의 삶을 엿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 c.s. 루이스, 『기독교적 숙고』 “종교의 언어” 중
둘째 아들이 아픔을 호소하며 울었다. 사건의 발단은 디폼블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딱딱한 디폼블럭을 끼우며 무언가를 만들다 말랑한 손에 생채기가 난 것. 때마침 내가 어제 꼭 사 오라고 신신당부했던 귤을 신랑이 사 왔고, 그 귤을 까먹다 아물지도 않은 상처에 귤즙이 스며든 것이다.
얼마나 아팠는지 아이는 떼굴떼굴 구르며 “아파! 아파!”를 반복하며 울어재낀다.
잠자던 아빠도, 친구와 게임을 하던 형도, 책을 읽던 엄마도 도무지 집중할 수 없을 만큼의 데시벨이다.
그 소음 속에서 우리는 각자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좋은 말로 토닥이며 달래 보다가, 호호~ 상처를 싸매고 불어주다가 더 큰 소리로 울어버리는 통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 준다. 그런데도 울음의 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저 작은 손이 얼마나 아팠을지에 대한 걱정보다 우리에게는 짜증이라는 감정이 더 우세했다.
‘정도껏 하지!’ ‘엄살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런 마음들이 겹겹이 쌓여 작은 아이를 꼭 안아 주지 못했다.
우리의 아픔의 기준에 아이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던 그 시간을, 나는 뒤늦게 후회한다.
이제 막 여덟 번째 해를 살기 시작한 지 고작 닷새가 지난 아이 앞에서, 어른인 내가 보여 준 모습이 부끄럽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는데, 요즘 나에게서는 다정함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몸을 돌보기보다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쓰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몸에는 군살이 붙고, 목과 어깨가 점점 굳어 가는데도 몸이 보내는 SOS 신호를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장 약한 존재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닫는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아서, 내 아이가 충분히 돌봄 받지 못하고 있구나..
아이를 재우고,
이 밤에 엄마는 조용히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다.
새해에는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지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