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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Mar 28. 2022

어떤 밤





 사랑한다는 말(A Word)



 8. 어떤 밤



 돌아온 방안은 조용한 가운데 빗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창틀에 부딪치는 빗방울의 흩어짐이 일정한 간격으로 유리창을 흔들었다.

 빗소리에는 고요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조용히 앉아서 숨은 고요를 듣는다. 빗방울 사이마다 깃든 침묵을 듣는다. 소리 없음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빗속에 서게 된다. 빗방울 사이의 고요를 듣는 사람은 그의 외로움도 알 것이다.

 그치기를 바랐지만 날씨는 마음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날씨를 닮는 걸지도 모르겠다. 비가 내리기 전 작은 습도의 변화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씩 기분이 가라앉지 않던가. 바람 한 점, 낙엽 한 장에도 마음은 쉽게 흔들렸다. 돌아가고 싶은 기억들이 떠올라서 나를 괴롭게 했다.

 다시 예전처럼 자유로우면 좋겠다. 아무도 나를 구속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내가 잃을 것들이 많았다. 한 사람이 주는 안정과 평화를 가짐으로써 내게는 잃을 것이 생겨버렸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날카로운 눈으로 창밖을 노려 보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떨어지는 빗물이 마른 마음을 달래주었다. 신기하게도 비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침잠하지만 절망하지는 못하게 했다. 여전히 모르겠다. 어떻게 쏟아지는 비가 우리를 어느 수준의 감정 상태로만 잡아두는지를.

 나는 아름이에게 적응해 있었다.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눈을 뜨는 아침마다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잠드는 밤마다 작별 인사를 건넸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우리는 하나의 생활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싶을 때마다 어디엔가 마음을 남겨둘 수 있었다. 잠에서 깬 그녀가 내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없는 것처럼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녀는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겠지만 마치 그럴 것처럼 나는 두려웠다. 나 또한 돌아서지 않겠지만 매번 그녀는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불안에 떠밀려 서로에게 다가서는 걸지도 모른다. 충돌이 예정된 선박들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만 지르다 마침내 부딪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결혼이란 그런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이라는 것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문을 굳게 잠근 채 빈틈없이 사방을 가려두고 있었다. 대단한 것을 허락할 듯이 치장하고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녀석은 문 뒤에서 나로부터 강탈할 것들의 목록을 적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동태를 파악하며 대치하고 있었다. 우스운 건 결국 내가 그 문을 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미 정답은 나와 있었다. 아름이를 잃는 것보다는 다른 것들을 양보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불분명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지금처럼 허무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날 그 말은 세상 모든 것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충만했고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내게 자신감을 주었고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서 있는 척했던 자신감이 실제로 생겨나 버렸다. 사랑을 얻기 전의 나는 사기꾼에 가까웠지만 그 뒤의 나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게 모든 걸 안겨준 그것을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처럼 오늘의 나를 허무하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그 말이 이제는 무엇이든 해내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무엇이든 해낼 준비가 되어 있냐는 훈련소 교관의 고함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큰 소리로 대답해야 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의 결혼은 행복이고 아이는 축복이겠지만 내 결혼은 직장 상사에 대한 복종이고 아이는 여생이었다. 누군가는 꿈처럼 살겠지만 내 삶은 현실이었다. 누군가에게 아이는 새로운 즐거움이겠지만 내게는 가능성의 종말이었다. 전에 꿈꾸던 것들을 이제는 서랍에 넣어두어야 할 것이다. 바보처럼 술자리에서나 그리워하게 되리라. 숱한 술자리에서 본 부장들의 짙은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들의 비루함이 실은 내 미래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것이다.

 유리창 속 어둠에 비친 풍경 가운데서 나는 부엌의 찬장을 발견했다. 아름이를 보내며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오래된 편지를 담아둔 편지통이 있었다. 그 안에는 아름이가 보낸 편지가 있을 것이다. 친구들이 보낸 편지도 있을 것이다. 지혜, 지혜가 보낸 것도 있으리라.

 분노를 적은 편지를 친구에게 준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그 친구와는 완전히 절교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편지는 오랫동안 남기에 분노를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로지 분노는 말로만 표현하고 바람에 흩어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그 글을 읽을 때마다 화가 치솟았을 것이다. 글로 이룬 분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르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글에는 사랑이 담겨야 한다. 말로는 화를 내더라도 글로는 사랑해야 한다. 만약 이와 반대로 행동하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바닥에 앉아 그 통을 열어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잊은 한 사람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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