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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Mar 30. 2022

어떤 편지





 사랑한다는 말(A Word)



 9. 어떤 편지



 신용카드 크기의 작은 엽서를 쥔 채 나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함정에 떨어진 듯한 아득한 감정을 느끼며 그 쪽지를 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마주할 때 느끼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아직 지상으로 기어오르지 못한 내게는 다른 감정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네가 혼자 아파하는 모습이 나까지 힘들게 해.’

 아랫줄을 읽었다.

 ‘언젠가 마음이 편해진다면 내게 말해주면 좋겠어.’

 마지막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사랑하는 수현이에게, 지은이가.’

 나는 그녀를 몰랐다. 그녀를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앞뒤를 훑어봤지만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성도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약간은 바랜 듯한 엽서가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줬지만 그것이 아름이의 전인지 지혜의 전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한동안 멍한 상태로 그 쪽지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완벽하게 그녀를 잊었다.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네가 혼자 아파하는 모습이 나까지 힘들게 해.’

 나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혼자 짊어지려는 사람, 혼자 해결하려는 사람, 모든 결실을 이루어낸 뒤에야 사랑을 찾는 사람.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젠가 마음이 편해진다면 내게 말해주면 좋겠어.’

 그때도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났다. 곁에서 기다리는 사람, 혼자 동굴로 들어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이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 기다리던 끝에 애달픈 마음을 편지에 적어두고 사라진 사람. 내가 잊은 그녀도 그런 사람이었다.

 ‘지은이가.’

 지은이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녀를 몰랐다. 분명 그때는 알았을 텐데 잊어버렸다. 내가 모르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그녀를 완전히 잊은 것이다.

 어느새 방안을 두드리던 비는 그친 뒤였다. 창문을 열자마자 찬 바람이 쏟아졌다.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비 그친 어둠을 보고 있었다. 그곳은 더는 나를 위로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사랑하는 수현이에게,’

 나는 왜 그녀를 잊었을까. 이 엽서만 남은 건 그녀와 헤어졌다는 뜻인데 도대체 어떻게 헤어졌을까. 휴대폰에도 지은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지운 걸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존재하는 사람이기는 할까. 순간 나는 내 손에 쥔 엽서의 존재마저 의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덩그러니 남아서 내게 말하고 있었다. 한때 가졌지만 잃어버린 사람이 있음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이 지나 이 엽서를 상자에 넣고 나면 다시 예전처럼 잊고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사무치듯 아쉽지만 내게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 엽서의 존재를 알기 전에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지 않았나. 그러니 이것은 내게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아름이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신저를 열었지만 이미 그녀가 메시지를 보낸 지 세 시간이 지난 뒤였다. 잘 도착했다고 답장을 보냈지만 읽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자고 있으리라. 나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우리도 잊힐 것이다. 지혜가 첫사랑이고 아름이가 다음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게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지은이라는 여자애 말고도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편지로 남지 않았기에 내가 잊은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거짓말처럼 잊었다. 정말 기억도 못할 정도로 잊어버렸다. 그렇게 내 아픔에 공감하고 나를 기다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잊었다. 그냥 그렇게 잊혔다.

 내가 아름이를 놓친다면 우리는 서로를 잊을 것이다. 얼마간 사랑의 지도이니 나침반이니 하며 입에 침을 바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결국 서로를 잊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다. 얼마나 사랑하든 사랑했든 이별은 서로를 기억할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의 사랑이 겨우 그 정도라는 것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녀와 내 사랑은 헤어지면 잊힐 것이었다. 아름이와 내가 서로에게 쏟는 애정과 관심은 결국 이별하면 사라질 것이었다. 편지 한두 장으로 남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잊고 살게 되리라. 우리의 사랑은 겨우 그런 것이다.

 서로를 지킬 때만 남는 것, 서로를 놓치지 않을 때만 유지되는 것. 그것이 내가 하는 사랑이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았다. 서로를 붙잡지 않고 지키지 않을 때 우리의 사랑은 끝났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하는 사랑은 끊어질 듯 위태로운 사랑이었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우리 사이를 가를 수 없을 것처럼 느끼지만 단 한 번의 단호한 거절로도 그녀와 나는 서로를 잊는 길로 향할 수 있었다. 사람은 너무 쉽게 과거를 잊는다.

 나는 아름이가 써준 편지들을 돌아보았다. 밖으로 꺼내 가지런히 정리한 십여 개의 봉투들은 깔끔히 분류한 영수증처럼 날짜순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그들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아름이가 써준 편지들은 아름이와 헤어진 뒤에나 의미를 가질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은 편지로 서로를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바로 대화할 수 있었다. 서로를 놓치지 않는 한 편지는 과거에 머물 것이지 현재를 빛내줄 것은 아니었다. 오늘 필요한 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였다. 과거를 돌아보는 건 헤어진 뒤에나 할 일이다. 우리는 오늘 사랑하고 내일을 계획해야 한다.

 휴대폰을 보았지만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역시 그녀는 잠든 듯했다. 내 메시지를 기다리다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사랑하며 내일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었고 잠시 아프겠지만 이내 서로를 잊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덧없는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고 매 순간 서로를 선택하지 않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로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놓치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살게 될 것이다.

 비로소 나는 내 삶을 영원한 어딘가로 이끄는 길을 찾았다. 우리가 서로를 붙잡아 준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오늘을 차리고 내일을 준비하며 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정말 목적이었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을 잊히지 않게 해주었고 세상에서 그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도록 그를 지켜주었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한 사람이 타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자 관심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서로를 의미 있는 존재로 지탱해주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은 서로의 삶을 비참한 수준에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로부터 사랑받아 왔기에 그 사실을 모른 것이다. 내가 잊어버려 한순간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이 있었음을 알아차리며 비로소 나는 받아온 사랑과 준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날이 오기 전 지혜를 만났더라면 내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놓치지 않는 대가로 내가 누려오던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오랫동안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 선택은 나를 한 남자에서 그 남자로 바꾸어 놓았다. 내 삶을 어떤 삶에서 그 삶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렇게 나는 반환점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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