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종 Apr 01. 2022

어떤 하루





 사랑한다는 말(A Word)



 10. 어떤 하루



 “수현 대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강 차장을 따라 들어간 회의실에서는 옆 방의 경영지원팀이 새로 들어온 직원의 환영 파티를 하고 있었다.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케이크 조각들이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이리저리 옮겨지는 모습을 보던 강 차장이 다시 나를 데리고 회의실을 나왔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그녀가 건너편 방의 지역지원팀으로 들어가더니 그곳에 있는 직원 하나를 붙잡고 무언가를 수근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짧은 대화를 마친 그녀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 봐.”

 나는 그곳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창밖을 힐끗거리며 안을 들여다보는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견뎌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 차장이 한 뼘만한 서류 뭉치를 들고 회의실로 돌아왔다.

 “설마요.”

 “역시 남 대리밖에 없어. 다들 바빠서 어쩔 수가 없네. 곧 국정감사 시즌인 거 알지?”

 “왠지 바람이 차더라고요.”

 “볕이 따뜻하면 가을이라 하지 않던가? 쌀쌀해지면 알아서 눈치채야지.”

 그녀가 내 쪽으로 서류 뭉치를 들이밀었다.

 “일전에 세종시 내려가서 간담회 한 거 기억나? 그때 받은 참고자료들이야. 참석한 지역 기관장이 만든 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그쪽도 시군구 센터에서 받은 건데 파일을 요구하니 없다고 하네. 아래로 내려갈수록 일 처리가 주먹구구식인 건 어쩔 수가 없어.”

 “설마 스캔하라는 건 아니죠?”

 화투패를 쓸어넘기듯 두꺼운 서류 뭉치를 그녀가 보는 앞에서 길게 늘어놓았다. 그녀는 그 광경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내 얼굴을 향한 바른 시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야 해. 내가 포스트잇을 붙여놨으니까 그 페이지들만 따로 타이핑 해주면 좋겠어.”

 “차장님은 저한테 뭘 해주실 건가요.”

 “역시 남 대리야. 자료는 기록물 담당 직원한테 물어서 우리 부서 문서고랑 통합 문서고에 올리고 타이핑한 자료는 나한테 따로 보내주되 조수진 대리 참조 걸어줘. 알았지?”

 그녀의 시선을 피해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강 차장은 못 들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수현 대리처럼 다들 일 처리가 깔끔하면 좋겠어. 차마 이름은 말 못 하지만 아무튼 그런 직원들 몇 명 있는 것보다는 수현 대리 한 사람 있는 게 훨씬 나아.”

 결국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 뭉치를 정리해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벌써 시간은 네 시 반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에게 기한을 묻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말을 끝내자마자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주까지 하면 되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내일 오전에 조 대리랑 어떤 형식으로 만들지 결정하려고 했거든. 오늘 중으로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러게요.”

 안 그래도 어질러진 책상에 두꺼운 서류 뭉치까지 더해지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류들은 끝이 약간 구겨지고 군데군데 스테이플러를 찍은 자국과 끝을 접어 표시한 흔적까지 남아서 통째로 스캔을 돌릴 수는 없었다. 낡은 복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모두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이걸 한 장씩 스캔한다?

 “조 대리님.”

 안경을 끼고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녀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저 이거 한 장씩 스캔해서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하는데 잠시 커피나 한잔하시죠.”

 비로소 그녀가 고개를 돌려 서류 뭉치를 보았다. 그리고 초연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안경을 벗었다.

 “드디어 이 길로 오시는군요.”

 “일부러 조용히 지냈거든요. 아무도 저를 떠올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차장님은 다 알고 있었어요. 저번 주에도 저한테 요즘 남 대리 하는 거 없냐고 물어봤거든요.”

 “역시.”

 “어차피 저도 오늘 야근이라서. 가시죠.”

 사무실 일 층으로 내려간 우리는 입구 옆에 붙은 테이크 아웃 전용 카페에서 한 잔에 990원짜리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 사람 잘생기지 않았어요?”

 “제 취향은 아니네요.”

 “눈이 왜 이렇게 높아요.”

 “그러니까요.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혼자 사는 것도 좋죠.”

 “막상 혼자 살라면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연애를 오래 하다 보니 혼자 어떻게 지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기억나게 해줄까요.”

 옥신각신하던 끝에 커피가 나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건물 주위를 돌았다. 한눈에 보아도 어리게 생긴 커플들이 우리의 옆으로 지나갔다. 그녀가 지나간 연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을 때다.”

 “지금도 좋을 때죠. 아직 조 대리님은 젊잖아요.”

 “예전에는 어리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젊다고 하네요.”

 “어리다기엔 좀 그렇고, 젊다는 데서 만족하셔야지.”

 “어디서 남자를 만나죠? 진짜 소개팅 어플이라도 써야 하나?”

 기호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이 나서 그녀에게 말해주려다 왠지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한번 써봐요. 괜찮은 사람도 있대요.”

 “그런 것 말고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통로가 없어요. 소개로 만나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주변에서 찾아볼게요. 조 대리님 취향이 박서준이랬나.”

 금세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단어만 꺼내도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이름만 들어도 회복되는 거예요?”

 “남 대리님은 안 그래요? 좋아하는 연예인 없어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잡으셨나 보네.”

 아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뒤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나는 미래를 계획할 필요가 있었다. 절약하고 저축할 이유가 있었다. 나 혼자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싫증 내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그려오던 삶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한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었다. 일어나고 잠드는 생활에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내 곁에 누워있었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가끔은 부엌에 있다가도 소파에 앉아 잠들곤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 삶에 나는 매료되어 있었다.

 “어떻게 한순간에 생각이 바뀐 거예요?”

 조 대리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편지 이야기를 꺼내자니 부끄러웠고 다른 이야기를 하자니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차에서 한 생각을 말해주었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남 대리님이 많이 고민하셨을 테니까.”

 커피를 마시며 걷는 그녀를 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과 감정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었다. 말이나 글로 알려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바랐다. 그럼 우리는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사무실로 올라와 서류 뭉치를 들고 복사기 앞에 섰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힐끔거리던 강 차장이 급히 모니터 뒤로 얼굴을 숨겼다.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탁하고 서류 뭉치를 내려놓으며 복사기의 덮개를 열었다. 스캔하러 온 사람을 반기는 건지 복사기는 눈이 찡할 정도로 밝은 빛을 비추더니 이내 종이를 읽을 준비를 마쳤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시간을 들여서 하면 그만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아름이에게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휴대폰을 켜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가 읽을 것이 기다려졌다. 메시지로 이야기할지 밤에 전화로 알려줄지가 고민되었다. 어떻게든 나는 그녀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서로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게 될 것이 즐거웠다. 나한테 미안해하는 강 차장의 눈치와 아직 사랑을 모르는 조 대리의 시무룩함을 얼른 알려주고 싶었다. 가벼운 마음을 알아챈 듯 복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겨우 첫 장을 넘기고도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전 09화 어떤 편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