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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Apr 04. 2022

어떤 사랑





 사랑한다는 말(A Word)



 11. 어떤 사랑



 ‘지긋지긋한 채무, 이제는 새로운 출발을 할 때입니다. 개인 회생 파산 전문 법률사무소.’

 별다른 생각도 없이 앞자리 뒤편에 붙은 광고지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창문 너머로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의 붉은 후미등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버스는 어디론가 향할 뿐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얼굴만 바뀌는 가운데 나는 손잡이를 쥐고 선 주변 이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들 중에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고단한 하루에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정처 없이 방황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삶에 의미가 되어 줄 무언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 품은 꿈들이 떠올랐다. 한참이나 어린 시절 나는 과학자를 꿈꾸었다. 그 꿈을 꺾은 때는 중학생 시절이었는데, 내가 원소 기호를 외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였다. 그 뒤로 내 꿈은 자주 바뀌었다. 고려 시대 유물을 캐는 고고학자가 되기도 했고 드랍쉽으로 섬맵을 누비는 프로게이머가 되기도 했다. 그들 중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때는 대학에 들어간 뒤인 것 같다. 왜 사학과에 왔냐며 비릿한 웃음으로 나를 반기던 한두 학번 위의 선배들을 보자마자 알아차린 것이다. 저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살길을 찾아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개인 회생 파산 전문 법률사무소.’

 저 사람은 행복할까. 삶의 막바지에 몰린 이들로부터 돈을 벌어들이며 그는 행복할까.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전문직이니 나 같은 보통 사람이 모르는 일을 하며 돈을 벌겠지. 막연한 생각에 비친 그의 삶은 행복해 보였다. 잘릴 염려도 없을 것이고 망하는 사람이야 항상 있을 테니 돈벌이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사기꾼도 파산하고 사기를 당한 사람도 파산하니 남는 장사가 아닌가.

 나는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매달 우리가 벌어들이는 얼마 안 되는 돈은 서로의 생활을 지탱하는 수준으로 끝났다.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고 땅을 사는 게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한때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나는 타고난 모습 그대로였고 후천적인 노력으로 조금 교정이 가능한 수준에 불과했다. 직업은 그런 내가 견딜 만한 일을 찾는 작업이었고 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버틸 만하다고 느꼈다. 지금의 직장은 내게 버틸 만한 일이었다. 꿈을 좇아 떠나기는 어려웠다. 사실 그럴 만한 꿈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꿈이 있었다면 지금의 삶도 괴로웠으리라. 꿈이 없어서 편안한 것이다. 꿈이 없으니 불만 하나 없이 적응한 것이다.

 창밖의 차들은 나보다 뒤처지거나 앞서갔다. 나는 그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버스에 탔다는 사실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일 뿐인 내 앞뒤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더없는 무력감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한때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세상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릴 때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와 보니 타고난 재능과 재산 없이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 그런 게 있을까. 그런 게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본 적이 있을까.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를 내렸다. 원룸이 몰린 주택가로 향하는 이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걸었다. 그들은 마찬가지의 표정과 뒷모습으로 집을 향해 돌아갔다. 내일이면 또 같은 얼굴과 옷차림으로 다시 정류장에 나타날 것이다. 이 수많은 복제 인간들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 정해진 시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는 정해진 삶을 반복할 것이다.

 이쯤 되면 다시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을 결혼이 오늘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천편일률적인 인생 과업이라 느껴지던 결혼이 문득 희망처럼 보였다. 유부남 선배들이 말하던 위험한 순간이라는 게 바로 지금일지도 몰랐다. 그 순간만 잘 넘기면 결혼하지 않을 수 있다며 열변을 토하던 그들의 취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결혼은 그 순간 내게 동아줄처럼 보였다.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계처럼 반복되는 생활이 두려웠다. 단조로우면서도 마약 같은 그 규칙성이 내 인생을 가져가 버릴 것 같았다. 정해진 시간에 켜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은 나보다 내 삶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주관적으로 살아왔지만 세상은 나를 객관적으로 이해했다. 내게는 소중한 감정이 세상이 보기에는 대중이고 인습이며 광고의 소재였다. 나는 나를 제외한 모두로부터 이용당하고 있었다. 소비자, 시민, 직장인, 삼십 대, 남성, 대중교통, 결혼적령기, 일인 가구. 그것이 세상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던 시절 내 삶을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꿈들이 사라지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낱낱이 분해되었다. 먹고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삶에는 주관이 없었다. 그것은 객체의 삶이었다. 유명인들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시나 글, 말과 노래에 의존해야 하는 삶, 내가 가진 재능에 값을 매겨 팔지 못하고 누군가가 주는 돈을 받아 무언가를 사들이며 살아야 하는 삶. 그런 점에서 나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이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홀로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너무 외롭고 무섭고 두려워서 차라리 결혼이 희망처럼 보였다.

 세상은 춥고 멀었다. 내게는 따뜻하고 가까운 것이 필요했다. 허기가 없는 사랑은 없었다. 사랑은 목적이 되어 주었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 없이 살아가는 삶은 너무 춥고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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