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A Word)
12. 어떤 전화
“오늘은 무슨 일 있었어. 얘기해 봐.”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조금씩 쌀쌀해지는 밤이 창밖을 점령하고 있었다. 거리의 불빛을 가리기 위해 블라인드를 내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전등도 켜지 않았지만 창 너머로 들어오는 도시의 빛 때문에 방안은 초저녁처럼 환했다. 창틀 모양으로 비치는 검은 그림자가 천장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밤마다 대화하는 이 시간이 좋았다. 계속 불빛이 눈을 부시게 해 방 안쪽으로 돌아누웠다. 아무도 없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외롭지 않았다.
“강 차장이 한 뼘만한 서류 뭉치를 주고 한 장씩 스캔하라고 했어.”
“저런, 그걸 다 했어?”
“혼자서 다 했지.”
“누구 도와달라고 하지. 조 대리님이 안 도와줬어?”
“조 대리는 지난주부터 바빴거든. 사실 내가 안 보이게 숨어 있다가 들킨 거라서.”
“그럴 줄 알았어.”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할 이야기가 많았다.
“복사기 앞에 서류 뭉치를 탁하고 내려놓으니까 강 차장이 모니터 위로 나를 살피다가 움찔거리는 거야. 신경이 쓰였던 거지.”
“미안한가 보다. 그래도 회사 일인데 같이 해야지. 오빠만 혼자 쉴 수는 없잖아.”
“나도 일은 있었어.”
“최근에 일 이야기를 안 한 걸로 봐서는 널널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편했다. 매사에 내 편만 들어주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르게 의심이 갔다. 얄팍한 아부로 이익을 보려는 사람은 아닐까. 그런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은 적도 있지만 냉정한 이들만 곁에 남기도 했다.
“또?”
“조 대리가 연애하고 싶은가 봐.”
“어떻게 알았어?”
“국정감사 때문에 요즘 고생하거든. 나도 스캔하느라 퇴근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서 커피 한잔했지. 사무실 주변을 걷는데 갑자기 그러는 거야. 소개팅 어플이라도 써야겠다고.”
“괜찮다고들 하던데. 사람 만날 루트가 없으니 어쩌겠어. 계속 사무실 사람들만 쳐다보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호는 좀 다른 용도로 쓰던데.”
“어떤 용도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섹스 파트너 찾는?.”
“아, 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사람도 있겠지. 자기가 필요한 대로 쓰는 거 아냐? 마음이 맞으면 그렇게 만날 수도 있고 다르게 오래 갈 수도 있고.”
“조 대리가 나한테 변했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변했는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만나서 얘기하면 좋을 텐데, 서로의 얼굴을 보며 손을 잡고 대화하면 좋을 텐데.
“자세히 말해 봐.”
그녀는 전화로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항상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보며 이야기해야 정말 대화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한 시간 남짓의 통화나 때로는 열 몇 줄짜리의 메시지만으로도 나와 소통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게 대화는 목소리나 글보다는 표정이었다. 눈가의 미소와 찌푸림이었다. 환하게 벌린 입술이거나 좁혀 모은 시무룩함이었다. 턱을 괸 왼손이었고 내 손을 쥔 오른손이었다. 종아리를 만지는 그녀의 발가락이었다. 나는 보고 만지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읽거나 듣는 걸로도 내가 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 내게는 그런 것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저번에 집에 늦게 데려다준 적이 있었잖아. 내가 도로 공사 때문에 늦게 도착해서 너한테 답장 못한 날.”
“답장은 했지. 내가 자느라 못 봤어. 그렇게 늦게 도착할 줄은 몰랐거든. 그날 고생 많았지.”
“엄청 고생했지. 근데 그날 도로 위에서 생각을 많이 했어. 그날따라 결혼이나 우리의 삶에 대한 생각이 많이 떠오르는 거야.”
“어땠어. 결론이 났어?”
“나도 정리가 잘 안 돼. 왜 그날 그렇게 생각이 많았는지 모르겠어. 너를 보내고 혼자 돌아가는 길이 외로워서 그랬나, 도로 공사를 하느라 다닥다닥 붙어 가는 차들을 보고 무심결에 떠올랐나. 삶이 의미 없다는 생각을 했어. 그냥 태어나 사는 삶이잖아? 누가 목적을 준 것도 아니고 말이야.”
“삶이 덧없게 느껴진 거야? 애늙은이 됐네?”
차라리 아부하는 사람을 가까이할 걸 그랬나.
“끝까지 들어 봐.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너를 사랑하는 게 지금 내 삶의 목적이 되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혹시 오그라드니?”
“아니. 좋은데?”
“좋아. 우리가 결혼한다고 하면 그런 것들이 떠오르잖아. 식을 올리고 집을 사고 아이를 낳고 학원비를 벌고 하는 그런 일들. 그런 것들이 결국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와 결혼하기로 선택한 누군가에게는 삶의 의미가 되어 준다는 걸 알았어. 왜냐하면 사랑하기 전에는 삶에 목적이 될 만한 것이 없으니까.”
“꼭 사랑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기호 씨도 섹스 파트너를 찾는다고 어플을 쓴다지만 꼭 그게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 잠깐의 쾌락도 우리가 선택한 목적이 될 수 있지. 아마 기호 씨가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만.”
“꼭 진지한 사랑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삶의 목적이 사랑이나 결혼만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야. 다들 자기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겠지. 결혼을 안 한다고 해서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오빠는 아직 나를 잘 모르지.”
왠지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를 잘 몰랐다. 그녀는 항상 내가 모르는 곳에 있었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그녀는 또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불빛을 쫓아다니는 마루 위 고양이처럼 나는 뛰어다니기만 했다.
“너는 왜 결혼하고 싶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것보다는 왜 오빠를 선택했는지를 물어야지.”
그녀가 대답했다.
“왜 나를 선택했어?”
내가 물었다.
“그건 비밀이야.”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어이가 없네.”
“방금 오빠가 요구한 게 상당한 대가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걸 인지해줬으면 좋겠어.”
“반지라도 가져와야 하니.”
“그것도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지.”
“목걸이는 어때.”
“목걸이보다는 반지가 좋겠어.”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우리는 이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녀가 오늘 회사에서 겪은 일들을 들으며 해외 사업부 팀장에 대한 악평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정보로 추가했다.
“너랑 친한 분이야?”
“작년에 같은 부서에서 일했거든. 그때는 괜찮은 분이었는데 왜 이런 소문이 퍼지는지 모르겠네.”
“워낙 좁은 곳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안 좋은 이야기도 빨리 퍼지고 말이야.”
“별 끈덕지 없이 그런 이야기가 돌지는 않을 텐데.”
“너무 깊이는 끼지 마.”
“내 소문도 아닌데 무슨 끼일 일이 있겠어. 걱정하지 마.”
그녀는 모든 사람들과 무난하게 지냈다. 그 성향이 때로는 다들 싫어하는 사람과 친한 것처럼 비추어져 손해를 볼까 걱정스러웠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거 어디서 듣던 말인데.”
“오빠가 자주 하는 말이지?”
“너도 나처럼 되어가고 있구나.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코웃음 치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렸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잘 시간이었다.
“잘 자.”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녀가 전화를 끊으며 통화가 끝났다. 나는 여전히 이불 속에 있었다. 아직은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남은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했다. 그 목소리는 매일 밤 나를 찾아왔고 아침이면 사라졌다. 그것은 멀어서 아쉬운 것이었다. 우리가 가까워지면 내 마음도 변하지 않을까. 함께 살게 되면 오늘 밤 이 통화의 소중함을 서로가 잊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또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소중하던 것들이 조금씩 빛을 잃어가는 것.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과제가 우리 앞에 새로이 나타나는 것. 결혼은 연애의 연장이 아니었기에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줄 것이다. 다시 그 삶에 적응해 소중한 것을 찾게 되리라.
지금의 내게는 미래의 삶을 내다볼 능력이 없었다. 닥쳐올 삶의 변화를 좋다 나쁘다 평가할 근거도 없었다.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은 늦은 밤 전화 한 통에도 행복하지만 나중에는 또 다른 것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동반자가 생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맞은편에 두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나란히 앉아서 다가오는 삶의 변화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것이다. 그 과정을 지키고 살피며 서로의 곁에 남아주는 일이다. 어느새 사랑은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