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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Apr 11. 2022

어떤 다짐





 사랑한다는 말(A Word)



 14. 어떤 다짐



 이상하게도 조 대리는 내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며칠 내내 그녀를 도와줬음에도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같은 팀의 직원 몇몇이 사내 메신저로 물어볼 때도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남 대리, 수진 대리랑 싸웠어?”

 심지어 강 차장마저 점심을 먹는 틈을 이용해서 내게 물어볼 정도였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나와 이야기하기조차 거부했다.

 “이따가 하시죠.”

 자판을 두드리며 나를 힐끗 쳐다보는 그녀는 나와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시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며 할 일을 마무리하던 중 결국 강 차장이 나를 사무실 밖으로 불러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강 차장이 팔짱을 낀 채로 내게 물었다.

 “수진 대리 왜 저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출근할 때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아직까지 저럴 줄은 몰랐네요.”

 “둘이 다툰 거 아니지?”

 “조 대리가 국정감사 준비하는 거만 계속 도와줬어요. 일이 많아서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아닐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럴 거면 진작에 힘들다고 했겠지.”

 그녀가 내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내 느낌에는 남 대리랑 뭔가 있는 것 같거든. 한번 잘 생각해보고 풀어줘 봐. 주변 사람들이 다 느낄 정도로 기분이 안 좋으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자리로 돌아온 나는 그간의 내 행적을 되짚어보았다. 혹시 그중 하나라도 내가 잘못한 것이 있었는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일 하나를 꼽자면 나는 이걸 말할 것이다. 화난 여자 앞에서 뭘 잘못했는지를 스스로 생각해내기. 빌어먹게도 이 작업은 연인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이따금 요구되었다. 내 인생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나 두 개쯤 잘못을 찾을 수 있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못 짚었다며 더 큰 분노를 불러오기 일쑤였다. 남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놈들은 차라리 주먹질을 할지언정 엿 같은 점을 내 앞에서 분명히 밝혔다. 여자애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꾹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죽이려 들었다.

 천천히 지난 며칠 간의 내 삶을 부정해보기 시작했다. 소작농들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는 대지주의 심정으로 지나온 삶을 냉철히 비판해보았다. 생일을 놓쳤나, 혼자서 일할 동안 점심을 먹자고 말하지 않아서 그런가. 분명 무언가 배려하지 않은 탓일 텐데. 약속을 했는데 잊은 거라도 있었나.

 이 주일 치 메시지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떤 약속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내 전자우편 시스템에 접속해 내가 보낸 메일들의 머리말과 꼬리말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달달한 것이라도 사와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럴 때 먹을거리를 사왔다간 겨우 이런 걸로 나를 매수하려 드느냐는 눈빛으로 째려볼 것이 분명했다.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내 눈을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매번 그랬듯이 회초리를 들고 와 손을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내가 잘못했을 것이다. 혹시 그날인가.

 “옆 부서에 떡 선물이 왔는데 드시러 오세요.”

 낯익은 직원 하나가 문을 열며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팀원들은 썰물처럼 사무실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강 차장이 마지막으로 나가며 쾅 하고 문을 닫자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죄인의 심정으로 그녀에게 읍소했다.

 “조 대리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죽을죄를 진 것이 분명하다.

 “떡 먹으러 갈래요?”

 “저는 괜찮아요. 혼자 다녀오세요.”

 간신히 얻어낸 대답에 화색이 돌았다. 여전히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조금이나마 성과를 이룬 것에 안도했다.

 “요즘 일이 많아서 힘드시죠.”

 그녀가 잠시 나를 힐끔거렸다가 눈을 돌렸다.

 “다들 힘든데 누가 더 힘들고 덜 힘들고 할 게 어딨어요.”

 얼음으로 만든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하고 있다는 것은 실낱같은 화해의 가능성이 남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도 조 대리님이 가장 바쁘다는 걸 다들 알고 있죠.”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일하시느라 밖에도 못 나갔을 텐데 제가 커피라도 한잔 사 올까요?”

 “남 대리님이 제 커피를 왜 사주시죠?”

 어라.

 “조 대리님 커피는 제가 항상 사드릴 수 있죠.”

 조금이지만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다시 사라지려는 그 기운을 잡아두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와서 하는 게 어때요. 트윈타워 쪽에 폴바셋이 있는데 따뜻한 라떼나 마시러 가요.”

 나는 천재가 틀림없다. 하지만 아까 그녀가 한 질문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질문은 친구 사이에 나올만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은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는 나갈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시죠.”

 코트를 집고 앞장선 그녀를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떡을 먹는 줄 알았던 직원들은 문 앞에 선 채로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온 우리를 보자마자 그들은 깜짝 놀라더니 금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탕비실 창문으로 보이는 강 차장과의 어색한 눈 맞춤을 끝으로 우리는 복도를 벗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건물 밖을 걷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졌네요.”

 “그러게요.”

 이제는 대답할 마음이 생긴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길을 건넜다. 어느 빌딩이든 1층 구석에는 담배를 피우는 직장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조금씩 서로의 시선을 엇갈리게 두며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앞사람이 어색하지 않도록 풀숲이나 난간 끝으로 시선을 고정시켜 두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같은 자세로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낱낱이 나누어진 한 무리처럼 보였다.

 “담배라도 피우게요?”

 “신기하지 않아요?”

 자욱한 연기에 휩싸인 사람들로 그녀가 눈을 돌렸다.

 “다들 다른 사람처럼 서 있지만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잖아요.”

 “인상적이네요.”

 그녀는 적당히 대답하며 대화를 정리했다. 나는 그녀의 심중이 궁금했다. 본능적으로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그녀와 조금 떨어져 걸었는데 그녀도 그것을 아는 듯했다.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소화가 잘되는 우유가 들어간 라떼 두 잔을 주문했다. 결제를 마친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잠깐 앉았다가 갈래요?”

 나는 흔쾌히 응했다. 한참을 뜸 들이며 커피를 마시던 와중이었다.

 “아름 씨한테는 말했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밤마다 전화하거든요. 생각 정리가 필요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말해줄 만한 수준이 되더라고요. 생각이라는 게 처음에는 남한테 말할 만한 상태가 아니잖아요. 어떤 일이든지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 거니까요.”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나는 모르는 척했다.

 “저번에 조 대리님한테 말했던 것 있잖아요. 결혼이니 삶이니 의미니 하는 것들이요. 조 대리님한테 말할 때도 아직 정리가 안 됐던 것 같아요. 같이 이야기하며 조금 더 분명해졌다고나 할까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의 긴장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고민했지만 쉬이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물을 차례였지만 질문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불분명한 것은 그녀의 심경이었고 질문의 대상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카페에 가득 찬 사람들을 힐끗거리며 나는 한 생각을 떠올렸다. 물을 수 없다면 내가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나는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제가 말한 거 기억나요?”

 “어떤 거요?”

 “이 시간에 카페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고 한 거요.”

 “남 대리님은 불만이 너무 많아요. 저 사람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죠. 나는 저 사람들이 뭘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는데 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정말 중요한 건 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있는지예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보면 알잖아요. 저기는 공부하러 오고, 저기는 소개팅하러 왔네요. 저기는 나이 먹은 사람들끼리 동네 마실이나 나온 것처럼 보이고, 저기는 왠지 모르게 사기꾼한테 당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가서 구해줄 수도 없고.”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법원 앞에만 가면 그렇게 카페마다 사기꾼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드디어 그녀가 미끼를 물었다. 자기 이야기를 꺼내려던 그녀가 살며시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아까의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어느 분한테 들었어요? 정말 그렇게 사기꾼이 많대요?”

 재차 물어보자 그녀가 못 이기는 척 대답해주었다.

 “친구가 법원에서 일하거든요. 가끔 술자리에서 판사님한테 이야기를 듣는데 교대역 스타벅스에 앉은 사람 중 절반은 사기꾼이래요.”

 “저도 가봐야겠네요. 저기도 종이 몇 장 펼쳐놓고 뭘 사인하라는 것 같은데.”

 “이름 잘못 적으면 큰일 나요.”

 어느새 그녀도 끙끙대며 서류를 읽는 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고정해두고 있었다. 속으로 안도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에게 더 자세히 물어볼지 말지가 고민되었다. 지금 물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는 게 좋은 행동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가끔은 대답을 듣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은 우리 관계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감정의 진실함을 추구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호수 위 오리배처럼 서로에게 부딪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배와 배 사이를 건너서 대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이 다르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새 그녀는 화제를 옮겨 사기를 당한 그녀의 이모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그녀의 속내를 알고 싶으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은 피하고 싶었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물어볼 수 없었다. 우리는 십오 분 정도 이야기를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서의 그녀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나아져 있었고 사무실에 들어와서도 별탈 없이 업무를 마무리했다. 강 차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눈짓했지만 나는 그녀의 제스쳐를 웃어넘겨 버렸다.

 목적이 없는 관계는 없었다. 관계는 허물어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모르는 순간에도 그것은 변화의 조짐을 알려왔다. 작은 떨림에도 쉽게 무너졌고 조그만 단서를 가지고도 큰 기대를 쌓아 올렸다. 두 사람 모두 한마음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이전의 관계를 지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주고받던 유리 공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일은 쉽게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전과 같이 조 대리를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많은 점들이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은 기회를 보자마자 이용할 준비를 마쳤다. 부끄러운 욕망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선은 억눌렀지만 그것이 언제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릴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전화를 하며 나는 아름이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것은 불확실한 것이기에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속내를 밝히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가능성을 내 안에 불러일으켰기에 꺼내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런 것 같다는 말은 나도 그런 가능성을 인지하기 시작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름이는 분명 내게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오빠는 어떻게 할 거야?’

 적당히 둘러대겠지만 결국 회사에서는 예전처럼 지내게 되리라. 그럼 아름이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할 것이 분명했다. 다른 행동을 취해야 하지 않겠냐고, 보다 확실한 제스쳐를 보여야 하지 않겠냐고.

 아름이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겼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어떤 밤이 오더라도 결코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기댈 것은 내 양심과 자제력밖에 없었다. 밖으로 드러낸 약속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다짐이었다.

 사랑하더라도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은 속으로 안고 가야 했다. 그녀와의 약속이 아닌 혼자만의 다짐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어쩌면 나와 다른 누군가는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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