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A Word)
15. 어떤 기다림
메뉴판을 보는 사람들을 지나쳐 로비로 걸어 나왔지만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일찍 온 터라 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막 일어서려는 커플 한 쌍이 보였다. 여자가 백을 들고 일어서고 남자는 빈손이었다. 별다른 주문도 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것 같았다. 그들이 비운 자리에 잽싸게 앉아서 휴대폰을 켰다. 블랙 티 한 잔을 주문한 채로 그녀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가게를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지혜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일은 왠지 모를 조마조마함을 가져다주었다. 사랑을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설렘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행복한 결과를 바랄 것도 아니었지만 분명 나는 기다림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는 걸 깨닫고 탁자 아래로 손을 숨겼다.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도 물을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막연히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나를 구해줄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기댈 곳이 없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냥 문자로나 받을 걸 그랬나. 어느새 감정은 후회로 치달았다.
그때 나는 아름이를 떠올렸다. 내가 속한 한 사람과의 삶을 생각했다. 어디선가 친구를 만나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그녀를 생각하자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한때 그랬지만 지금의 지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한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그랬듯이 그녀도 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래전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게 해주는 낡은 편지 같은 것이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이미 예전에 사라졌고 오늘 내 앞에 앉을 사람은 찬장에 숨겨둔 옛 편지일 뿐이다.
나는 과거를 그리워할 마음이 없었다. 예전의 감정을 바랄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그녀가 내게 전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도 이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던 것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건 낡은 봉투에 담긴 빛바랜 편지뿐이라는 걸. 그래서 우리는 스스럼 없이 대화하고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걸. 그것을 몰랐다면 우리는 계속 서로를 피해 다녔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내게 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잊히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또 어떨지 궁금해졌다. 다시 내가 잊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혜는 달랐다.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 단계를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이름을 붙이지는 못하지만 나는 분명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창밖으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건물을 돌아서 입구로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웠기에 내 마음의 부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