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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Apr 18. 2022

두려움





 사랑한다는 말(A Word)



 17. 두려움



 그녀가 결혼하고 나서야 결혼하기 전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결혼을 앞둔 내가 결혼한 그녀를 보며 느끼는 이 감정은 온전히 그녀라는 사람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나는 별다른 지식이 없기에 내 감정의 근원을 파고드는 데까지는 넘어갈 수 없었다. 나와 헤어진 지혜보다, 오랜만에 만난 지혜보다, 이미 결혼해 아이를 가진 지혜는 더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와 헤어진 수현이보다, 오랜만에 만난 수현이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만난 수현이는 그녀의 마음을 더 설레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 사이의 많은 것들을 대답 없는 짐작의 영역에 남겨두었다. 어렴풋이 넘겨짚으며 서로의 마음을 추측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이 묘한 설렘을 공유할 수 있었다. 행동의 경위가 분명히 밝혀지고 나면 오늘 있었던 일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이런 식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한 사람에게 매여 있지 않을 때 나는 보다 분명하게 관계를 규정지었다. 어떤 이성을 만나든 친구가 아니면 연인이었고 연인이 되지 못한 사람은 친구의 축에도 속하지 못했다. 아름이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전의 나는 그런 방식으로만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맺었다.

 이상하게도 지금의 내게는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어떤 관계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 만난 지혜이기도 하지만 어제 다툰 수진 씨이기도 했다. 나는 그 둘과 연인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하거나 그에 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내가 쏟는 관심이나 배려가 형편없이 낮은 수준에 속하지 않았다. 내가 무관심해도 알아서 나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친구였다. 배려 없음에 상처받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서로에게 악의를 가져서는 안 되는 사이가 친구였다. 그렇다면 지혜나 수진 씨와의 관계는 친구가 아니었다. 나는 둘을 배려해야 했고 무관심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야만 지금과 같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지혜에게 보여준 관심을 거두어들인다면 그녀는 내게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었지만 나로부터 무언가를 얻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것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녀가 시간을 내어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이 관계에서 얻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가 이런 불공평한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들과의 관계를 잇기 위해서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마음이 갔고 그렇게 관계는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아름이와의 관계는 달랐다. 분명 나는 아름이와의 삶을 그렸고, 그렇기에 내가 쏟는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아름이에게는 의식적으로 애정을 쏟고 있었고 수진 씨나 지혜에게는 보다 자연스러운 배려를 보내고 있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뚜렷하게 다가왔기에 어떠한 반론을 제기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누구를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아름이를 말할 것이다. 누구와 살기를 꿈꾸냐고 물으면 역시 아름이를 말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스레 배려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름이보다는 수진 씨가 떠올랐다. 지혜에 관한 관심도 내 마음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것이었다. 아름이를 향한 사랑에는 분명 의식적인 노력이 더해져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나로 하여금 그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냐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놀랍게도 이 질문은 그동안 아름이를 만나며 단 한 번도 던져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사랑에서 결혼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결혼을 목적으로 행동해온 것이다. 아름이와의 사랑은 처음 시작할 때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고 그것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의도되고 계획된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문득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흐르고 쏟기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사랑이 자연스럽지 않고 의도될 수 있다는 말인가. 계획이 요구되고 노력이 필요한 것을 가리켜 어떻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피어오른 본연의 감정이 아닐까. 결혼을 향해 계획된 감정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하면서도 왜 여태껏 사랑을 한다고 믿었을까.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지하철이 환한 햇살 속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나를 태운 지하철은 다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날 그녀가 보던 것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늦은 오후의 햇살을 한 뼘씩 받아든 채 유리창을 비추었다. 조각난 볕들이 사람들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일 동안 그들 대부분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지만 내게 보인 그들의 표정은 햇빛에 비쳐 밝게만 보였다.

 내게 말하던 아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것이 한 사람의 몫이냐고 묻던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그날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사랑은 각자의 몫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서로의 모습이 포함된 미래를 그리지 않았을 때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어제까지의 삶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한 삶을 이루기로 약속한 사랑은 그 다짐을 나눈 두 사람의 몫이었고 하나가 자기의 몫만을 다하겠다며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었기에 내 것도 아니고 그녀의 것도 아니었다.

 마음은 삶과 달랐다. 마음은 원할 때마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아름이일 수도 있지만 지혜나 수진 씨일 수도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삶은 달랐다. 우리가 약속한 삶은 마음에 휘둘릴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약속과 습관, 생활양식은 나나 그녀의 자연스러운 마음과 달라질 수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없고 이제는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사랑을 우리는 하고 있었다.

 한때는 마음을 좇아 사랑했지만 이제는 삶을 지키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알던 사랑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때는 자연스러움만으로 모든 것을 해낼 듯한 사랑을 했지만 이제는 의식적인 노력과 계획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해오던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차에서 울던 그날처럼 이미 그녀는 우리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새삼 그녀에게 고마워졌다. 그녀는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내가 결혼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마음가짐을 가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내게 정답을 알려주거나 노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고 나 또한 그렇게 나를 기다려주던 이들을 하나씩 잃어가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할 수 없는 그녀가 그랬고 지혜가 그랬다. 나는 충분히 많은 실수를 저질렀기에 또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은 영원한 자유를 줄 듯이 나를 유혹하지만 돌아보면 소중히 여겨오던 삶을 하나씩 잃어버린 한 사람의 후회만 남을 뿐이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사랑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지혜를 만나 설렌 것은 마음의 일이었고 나는 그것을 막아설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앞으로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았다. 내 곁에 머무른 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를 이해하고 기다려온 사람을 다시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마음은 자꾸만 삶을 속이려 들지만 나는 그것을 견뎌내야 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의 자연한 마음과 싸워 이겨내야 하는 부담을 질 수 있는 걸까. 내가 정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결혼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다. 연애가 끝난 뒤의 사랑은 자연한 욕구와의 오랜 투쟁을 예고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일들이 너무 두려웠기에 나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혼자서는 결혼이란 것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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