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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Apr 20. 2022

사랑





 사랑한다는 말(A Word)



 18. 사랑



 메시지를 보내고도 한참을 기다렸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연락이 없는 게 비로소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이따금 휴대폰만 켜보며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밀린 설거지를 했지만 금방이었다. 새삼스레 와이셔츠를 빨아봤지만 치대고 헹구고 탈수하는 데는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메시지가 오지 않아서 이제는 바닥을 닦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무슨 일 있었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그날의 네온사인이 유리창을 물들이고 있었다.

 ‘별일 없었어. 재미있었어?’

 ‘정말 오랜만에 봤거든. 독일에서 만난 남자친구 이야기 듣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어.’

 그녀는 친구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조목조목 정리해서 내게 보내주었다. 아마 그 중 얼마간은 둘 사이의 비밀이었기에 숨긴 것도 있으리라.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요지가 무엇인지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결혼이 무섭다거나 두렵다는 것이 전부일 텐데.

 ‘전화해도 돼?’

 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정류장에 내려서 연락할게. 거의 다 도착했어.’

 그 시간은 내게 너무 길게 느껴졌다. 잠시 누워있다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겨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안 좋은 일 있었어?”

 그제야 나는 마음이 놓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내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별일 없었어.”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마음에 떠오른 질문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나랑 결혼을 앞두고 무섭거나 두려운 건 없었어?”

 휴대폰 너머가 조용한 까닭은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답을 생각하면서도 질문의 의도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 의도를 물은 다음 그것을 문제 삼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내 상황을 파악하기보다 오로지 말로써만 우리 사이의 이야기를 받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문 뒤에 숨은 상대를 끄집어내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때로는 누구에게나 안전한 공간이 필요할 것이므로.

 “나는 우리가 이렇게 오래 만나고 있는 게 신기해. 우리한테도 헤어질 뻔한 순간들이 있었잖아. 그런데 그런 일을 다 겪고서 여기까지 왔지. 나는 권태기라는 게 온다고들 해서 너무 걱정했거든. 하루아침에 마음이 바뀌어 버리는 거잖아. 그런 게 왔는지도 잘 모르겠어. 오빠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참 신기하고 고마워.”

 “나는 네가 고맙다고 해서 놀랐어. 네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내가 고마워하지 않을 이유가 뭐야?”

 “매번 내가 문제인 것처럼 느껴져. 이런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는 것도 그렇고 저번에 너를 울린 것도 그렇고. 어떻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어. 내가 한심해 보이지는 않아? 아쉬운 적은 없었어?”

 “오빠는 항상 자기 생각이 먼저잖아. 아무리 주변 사람이 이야기를 해줘도 오빠 생각이 진실에 가깝다고 여기니까. 그런 점이 마음에 들 때도 있지만 가끔은 누군가 솔직하게 말할 때 그것을 알아봐 줄 수도 있어야 해. 방금 내가 한 말도 말한 그대로만 들어주면 좋겠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세상과 다투고 있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나는 혼자 있을 때마다 세상과 충돌하며 문제를 일으켰다. 분노는 나를 특별하게 하고 무언가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수진 씨는 나를 가리켜 불평이 많다고 쏘아붙였지만 그것은 그만큼 내가 이 세상에 문제가 많다는 걸 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누군가 불만이 없다는 것은 그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경계를 무너뜨렸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스스로 경비태세를 거두고 허물어지게 했다. 세상을 향한 불만은 그녀에게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나의 투쟁이었고 직장 사람들한테나 말할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수진 씨에게는 그토록 쉽게 이야기했지만 아름이한테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새 나는 세상과 분리된 나만의 영역을 만들고 있었다. 그곳은 애정과 격려, 솔직함이 지배하는 곳이었고 그 밖의 분노나 경쟁, 비판의식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화를 내거나 독촉하지 않고 내게 따져 묻지도 않으며 자기의 솔직한 심정만 밝힌 채 시간을 내어준 것이다.

 “당연하지. 네 말이 아니면 누구 말을 믿겠어.”

 사랑받고 있는 걸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손이나 몸의 온기를 전달받는 것, 웃는 낯의 호의와 애정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는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사랑을 안다고 하려면 사랑이 가지는 의미까지 알아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새 예전보다도 사랑한다는 말은 더 무거운 무게로 다가와 쉽게 그 단어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

 “보고 싶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내 말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도 보고 싶어.”

 어느덧 전화를 끊을 시간이 되었고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기다렸다.

 “언제 잘 거야?”

 “바로 자야지.”

 “친구들이랑 잘 놀았어?”

 그 순간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그녀에게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비밀로 남겨두고 시간에 흩어 보내는 게 나을 것이다.

 “나쁘지 않았지.”

 “시큰둥하네.”

 “매번 보는 애들인데.”

 “그래도 오래 두고 보는 친구가 있어서 좋은 거지.”

 그녀가 뜸을 들였다. 아직도 문밖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

 “그래, 오빠도 잘 자고.”

 “너도 잘 자.”

 “사랑해.”

 “나도.”

 그렇게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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