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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Apr 15. 2022

어떤 관계





 사랑한다는 말(A Word)



 16. 어떤 관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는 그녀의 모습을 훑고 있었다. 이제는 어린 티를 찾을 수 없는 베이지색 원피스 차림의 그녀가 테이블 위에 까만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예전 같았으면 적어도 가방의 색깔 정도는 빨간빛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의 취향이라면 오히려 빨강 원피스에 베이지색 가방을 들고 오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눈가에는 반가움이 있었고 입술에서는 잠시의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서 마음은 이상하게도 설레었다.

 “오랜만이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내가 말을 꺼낸 것인지 그녀가 말을 꺼낸 것인지 헷갈렸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녀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몇 년 만에 보는 거니. 나는 변했는데 너는 하나도 안 변한 것 같다. 남자애들은 나이가 들수록 괜찮아진다더니 사실인가 봐.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 네가 별로였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좋게 알아들을 수 있겠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에 알았던 그 사람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까의 설렘은 잦아들고 긴장이 풀어졌다.

 “너도 그대로인 것 같아. 취향은 조금 달라진 것 같지만 여전하네. 네가 막 앉았을 떄는 소개팅하는 기분이었거든.”

 “그럼 이런 데서 보면 안 되지.”

 경쾌한 손짓으로 빈 의자에 가방을 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나도 주문하고 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 봐.”

 약간은 시대에 뒤쳐진 그녀가 주문을 하기 위해 계산대로 향했다. 그동안 나는 그녀의 가방을 보았다. 이제 그 가방은 고급스러웠고 누구나 알 법한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제 그 가방은 붉은빛이 아니었고 어디에서나 잘 어울리는 무난한 컬러였다. 그녀가 사라지고 가방만 남게되자 나는 다시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어색했다.

 그녀가 연락한 이유를 눈치채려 노력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일회용 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그녀를 보고서야 겨우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손님이 너무 많아서 머그잔이 없다나.”

 “텀블러가 없으니까.”

 “에코백을 메고 다닐 때는 그랬는데 말이야.”

 어느새 침묵이 찾아왔고 우리는 서로에게 할 말을 생각해내느라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내가 그녀에게 바뀐 취향을 말하자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며 어디에서 샀으며 누구의 추천을 받았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녀가 내게 나아진 외모를 칭찬하자 나는 최근에 다니기 시작한 압구정 헤어샵과 해외직구를 해야 하는 독일제 로션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 어느 지점부터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것이 아니라 약속된 만남이었기에 우리는 서로의 숨은 의도를 물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다만 누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어 자기가 감정적으로 하위에 있음을 받아들일지 선택할 단계에 와 있었을 뿐이다.

 별수 없이 내가 그 역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전화를 받았을 때는 되게 어색했겠다.”

 건물 옥상에서의 풍경이 떠올랐다. 멀리 보이는 빌딩과 그곳의 옥상이나 테라스에서 나처럼 전화하고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순간의 놀람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떨림, 막 목소리를 들을 때의 안도감과 남몰래 숨기고픈 은밀한 기대감. 그런 감정은 그 풍경에서 떨어져 나온 나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각인시켜주었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불륜에 빠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나를 특별한 존재로 고양시켰다. 평범한 일상을 이루는 어느 배경 인물이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두를 엑스트라로 만들어버리는 주인공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은 자기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나 아내, 부모라는 뻔한 역할 놀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네가 먼저 연락할 줄은 몰랐거든.”

 “나는 내가 먼저 연락할 거란 걸 알고 있었어.”

 그녀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어지자고 말한 사람이 연락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거든.”

 “아직도 네가 한 말이 기억나.”

 “헤어진 이유는 다 잊었다며.”

 “왜 헤어졌는지는 기억 안 나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네가 한 몇 마디 말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 아마 너는 내가 한 말을 기억하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 나오며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을 예상했을까. 오랜만의 만남을 너무 무거운 방향으로 이끄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만난 전 연인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 사이에 풀고 가야 할 것이 남았다는 걸 알았다.

 “그날 네가 말했잖아. 너한테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보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도 잊은 것이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어 잊었든 시간이 지나서 잊었든 그녀도 나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잊은 것이다.

 “너는 기억을 못 하겠지만 나는 하거든. 그때 네가 한 말이 맞는 것 같아.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도 너랑 비슷한 사람이야. 한동안은 너랑 다른 사람을 찾아다녔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니 비슷한 사람을 찾게 되더라고.”

 “나랑 비슷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아름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잊은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의 이야기까지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 만나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커피를 홀짝거렸다. 여전히 카페는 붐볐고 우리는 갈색의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끝이 테이블 밖으로 돌아섰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일까.

 “나도 네가 마지막에 한 말이 생각나네. 잊고 있었는데 네 말을 들으며 갑자기 떠올랐어.”

 “뭐라고 했지?”

 그녀가 웃고 있었다.

 “너는 기억을 못 하지?”

 “정말 기억이 안 나.”

 “나랑 있으면 네가 별로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어. 너도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내가 곁에 있으면 스스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랬어. 이제 기억이 나니?”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나마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니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든 것은 그녀의 역할이었을까 내 결핍이었을까. 어느 순간 아름이와의 관계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나는 변한 것이 없었다.

 “나도 방금 네 이야기를 듣고서 생각이 났어.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나라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지금 만나는 사람이랑도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거든.”

 “지금은 어떻게 하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막 떠오른 거라서 이제 생각해야 해.”

 “정말 예전이랑 달라진 게 없네.”

 그녀의 한숨 섞인 한탄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연락하게 된 거야.”

 아까부터 묻고 싶었지만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혜한테 물어봤지. 부끄럽지만 나는 네 번호를 헤어지자마자 지웠거든. 다시 연락하려고 하니까 휴대폰에 번호가 없는 거야. 그래서 정혜한테 수현이 번호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어. 정혜가 놀리더라.”

 나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정혜는 잘 지낸대? 나도 생일날만 연례행사처럼 연락해서 평소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거든.”

 “애가 벌써 어린이집에 들어갔어. 요즘 사람들이 아이를 안 낳는다는 거 다 거짓말이래. 아파트 단지에 있는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했더니 다들 둘씩 낳아와서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거야. 결국 더 멀리 있는 단지에 등원시킨다고 하더라.”

 “어른들 이야기 같다. 우리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잖아.”

 그녀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해서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은 나도 아이가 있어. 이제 막 돌을 지난 지 두 달이 됐거든. 정혜랑 자주 연락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

 얼핏 보았던 그녀의 손가락에서는 반지를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녀가 혼자일 줄 알았던 나는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옅은 이마의 머리칼과 눈가의 기미에서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흔적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인지 그녀가 한층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내게 보인 그녀의 성숙미는 결혼과 육아에서 온 걸지도 몰랐다.

 “결혼한 줄 몰랐어.”

 “남편이랑 이야기해서 친구는 조금씩만 부르자고 했거든. 장소 문제도 있었고 남편이랑 생각해둔 것도 있었고.”

 그녀는 계속해서 아이와 결혼, 정혜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 외의 것들로 대화를 이끌었다. 어느새 나는 그녀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있었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대화의 방향을 정했다.

 “지금도 귀엽지만 돌 전에 찍은 사진들이 엄청 예뻐. 동영상 보여줄까? 이 장난감이 육아 필수템이래. 다들 사다 보니 중고시장에도 많이 있어서 찾는 데는 어렵지 않았거든. 거의 돈 주고 살 뻔했는데 아는 언니가 쓰던 걸 친정에 뒀대서 얼른 가져왔지.”

 그녀가 보여준 영상에는 오색 빛깔의 버튼을 누를 때마다 서로 다른 노랫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과 아기가 있었다. 아기는 움직이는 모빌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턱살은 두세 겹으로 접힌 탓에 귀여우면서도 돼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앞에서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기에 예전 같으면 바로 해버렸을 장난을 나는 억지로 참아냈다.

 “결혼식 사진도 볼래? 어차피 가족사진은 볼 필요가 없고 스튜디오 사진만 모은 폴더가 어디 있을 텐데. 요즘은 하도 애기 사진만 찍으니까 결혼할 때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이 안 나. 그리고 그거 아니? 정말 애를 낳고 나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항상 문 닫으면 차 키 없고 문 열면 불 켜놓은 거 생각난다니까.”

 나는 웃으며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머리가 자꾸 빠져.”

 “얼핏 보면 티 안 나. 괜찮아 보여. 그래서 일부러 뒤로 묶은 거지?”

 “일부러 그렇게 한 게 티가 나니?”

 “아니, 네가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

 “살도 엄청 쪘어.”

 “그렇게 안 보이는데. 처음 봤을 때도 결혼하고 애 낳은 줄 몰랐다니까. 네가 말하고 나서 안 거야.”

 “그래?”

 “요즘은 아이를 낳고도 그렇게 몸 관리를 한다잖아. 너도 운동하고 관리한 거야?”

 “아니. 그냥 집에만 있었어.”

 “그래도 어디 돌아다니긴 했겠지. 정혜도 만나고 나 보러도 오고 이렇게 지내다 보면 친구들이랑 놀기 위해서라도 자주 움직이는 거잖아.”

 “친구들 보는 일도 잘 없어. 정혜 말고는 너랑 연락해서 본 게 처음이야. 정혜도 연락만 할 뿐이지 얼굴 보기는 어렵거든. 아이를 어디에 맡겨두고 와야 하니까.”

 “원래부터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지 않았나.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녀가 이야기할 동안 나는 아름이에 관하여 말할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했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는 앞에 앉은 여자와 아름이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둘은 많은 면에서 비슷했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없었기에 그들은 어렴풋한 경계로만 서로를 구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알던 사이다 보니 마음이 편하다.”

 “오면서 걱정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거든. 할 말이 있기나 할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막상 보니까 우리 사이에도 할 이야기가 있네.”

 “관계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것 같아.”

 “어떻게?”

 “이제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이로 이어진 것 같아. 우리는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 아예 안 볼 수도 있었고. 그런데 막상 이렇게 보고 나니 지금처럼 이것저것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 같아.”

 그녀에게 나는 다른 형태로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래전 이야기를 해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자기의 마음을 쉽게 알아차리는 사람, 만족스럽지 않거나 아쉬운 감정을 이야기했을 때 조건 없이 그녀를 지지해주는 사람. 나는 그녀에게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여전히 여자였다. 그녀 역시 내 속내를 알고 무슨 말을 하든 내 편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한 뒤 아이까지 생긴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녀는 여전히 한 사람의 여자로만 느껴졌다. 내 마음에 피어오르는 은밀한 기대감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감정을 반기지 않겠지만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름이를 생각했다. 삶은 조류와 같아서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어디론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벗어날 마음이 없었지만 실수로라도 떨어져 나오면 홀로 망망대해를 떠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렸다.

 “실은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만약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서로의 곁에 남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우리는 계속 사랑했을까. 남들이 하는 것처럼 때맞춰 결혼과 아이를 준비했을까.”

 아직은 그녀가 부담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헤어진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더 많은 갈등을 피하고 지금처럼 담담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해온 걸지도 몰라. 너를 다시 보기 전에는 우리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사이의 완성일지도 모르겠어.”

 나는 그녀의 인정을 바라지 않았지만 할 말은 해야만 했다. 별다른 감정을 찾을 수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우리가 어딘가로 넘어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웠지만 지금의 우리는 연락하기 전과 달랐고 다시 만나기 전과도 달랐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지만 몇 가지 일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가까워지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국 그녀에게 아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 분명 내 안에 숨은 약간의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그대로 놓아두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세 시간 정도를 이야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택시를 타러 가는 걸 배웅해주고 나도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이것은 분명 묘한 감정이었다. 죄책감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우쭐하거나 즐거운 기분도 들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어색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로의 간격을 넓히지도 좁히지도 않았다. 다만 헤어진 연인인 우리를 묘한 관계로 이끌었다. 나는 여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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