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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Apr 22. 2022

슬픔





 사랑한다는 말(A Word)



 19. 슬픔



 급한 불을 끈 터라 사무실의 분위기는 일주일 전보다 한결 더 여유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씩 식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조 대리와 강 차장이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나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 온 건너편 직원들 두셋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눌 동안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 느낀 마음 한구석의 답답함이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이전부터 내가 느껴오던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과는 달랐다.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여전히 나는 어젯밤 전화를 끊은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그토록 쉽게 그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사내 전산망에 접속해 반차를 냈다. 별다른 일이 없는 날이었기에 동료들에게 불편이 갈 것도 아니었다. 강 차장에게는 메시지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안 그래도 내가 신경 쓰였던지 그녀가 이내 답장을 보내왔다. 내일 돌아올 자리였기에 책상 정리도 하지 않은 채로 사무실을 나와버렸다.

 건물 밖으로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날은 화창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그녀에게 연락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집으로 가서 차를 가지고 나오기는 귀찮았다. 그렇게 가만히 건물 앞에서 잠시나마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벽을 따라 돌자 절 하나가 나타났다. 도심지에 위치한 절은 평일 낮에도 사람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 있는 벤치 하나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토록 쉽게 말할 수 있었을까.

 나만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모두는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지는데 나만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헛되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냥 해버리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이 아닌가. 아이가 생겨서 별수 없이 결혼하고, 나이가 들어서 그때 만난 사람과 하고, 돈이 있으니까 쉽게 해버리고. 이런 고민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닐까.

 혼자서 온 나이 든 여자들은 끊임없이 고개 숙여 절하며 탑 주위를 돌았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 적거나 기록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마음에 정한 나름의 숫자를 채우고 절 밖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할 텐데 왜 저러는 걸까. 누구도 저들을 기억해주지 않을 텐데 왜 저렇게 살아갈까.

 낮은 빌딩들이 멈추어 나를 내려다보고 건물 옥상에 매달린 광고판은 알만한 연예인들의 얼굴을 싣고 공중에 떠 있었다. 아마 나도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저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누구나 모래 한 알만큼 작은 점으로 남기에 나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아마도 내 고민은 아무도 알지 못한 채로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텐데. 우리의 아이들 말고는 우리가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도 없을 텐데. 우리는 세상에서 잊힌 채로 살아갈 텐데. 아무도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녀는 이런 삶을 살아갈 내게 함께 하자고 말할 수 있었을까.

 노란 띠를 맨 중년의 여인이 다가와 종이컵을 내밀었다.

 “커피 한잔 드세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게 커피를 주고도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내 곁을 지나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꾸벅이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요즘은 절에서도 믹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지 묽은 아메리카노였다.

 그녀는 종이컵 여러 잔이 올려진 쟁반을 한 손에 들고서 사람들에게 커피를 건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무심코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종이컵은 따뜻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절만 바라보았다. 이따금 슬픈 감정이 밀려들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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