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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Apr 08. 2022

어떤 약속





 사랑한다는 말(A Word)



 13. 어떤 약속



 “준비됐어?”

 그녀가 제자리걸음을 할 동안 나는 트렁크를 열고 등산화를 찾았다. 세차용 수건과 우산, 어디선가 선물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 빈 상자의 틈에서 갈색 등산화 한 켤레를 꺼냈다. 구두를 벗은 뒤 트렁크에 올려놓고 신발을 갈아신었다.

 “산책만 할 건데 너무 거창한 거 아냐?”

 “너도 러닝화 신었잖아.”

 “오빠 껀 뭐랄까, 히말라야에 가야 할 듯한 느낌인데.”

 트렁크를 닫고 몇 걸음 떨어진 그녀의 곁에 다가가 섰다.

 “너랑 하도 걷다 보니 구두 밑창이 너무 빨리 닳아.”

 그녀가 팔짱을 꼈다.

 산책로의 입구에는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도록 차단봉이 세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힘차게 팔을 흔들며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두 바퀴나 세 바퀴째 걷는 듯한 사람들의 목으로 긴 땀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바퀴만 돌고 올까?”

 어느덧 가을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밤을 메우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그 얇은 소리는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있었고 고개를 들어도 그곳에 있었다. 쉬지 않고 우는 벌레들의 소리는 가로등의 빛살과 함께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가느다란 바늘을 쏘아내는 듯한 빛살은 풀잎에 얹히기도 하고 줄기 가운데 떨어져 박히기도 했다. 빛이 닿은 풀과 나무들은 깬 것 같기도 하고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더 빨리 걷고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따라잡으려는 것처럼 서둘러서 걸었다. 분위기를 즐기며 천천히 걷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어제 왜 그 이야기 했어?”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지?”

 “조 대리, 강 차장 말고 다음에 한 거 있잖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결혼 이야기, 돌아가는 차에서 생각했었다며. 왜 그 이야기 했냐고.”

 그제야 떠올랐다. 아직 그녀에게 해주지 않은 말이 있었다. 결혼이 삶의 목적을 만들어줄 거라는 생각 말고도 다른 것이 있었다. 그건 행복하기만 하던 우리의 삶을 불행이 포함된 삶으로 바꾸어 놓으리라는 것, 내가 한순간 사랑을 잊은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붙잡지 않는 한 어이없게도 서로를 잃어버릴 거라는 것. 하지만 편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삶이라는 게 참 외롭지 않아?”

 “내가 곁에 있는데도?”

 그녀가 팔짱을 풀고는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너랑 있어서 다행인 거지. 네가 있으니까 너무 다행인 거야.”

 “이유 없이 그런 거구나.”

 듣고 보니 그런 듯했다.

 “그런가 봐.”

 우리는 말 없이 공원을 걸었다. 아파트 단지가 늘어선 그녀의 집 주변에는 걸을만한 공원들이 몇 개 있었다. 우리는 십오 분쯤 차를 타고 가야 나오는 언덕을 둘러싼 공원을 좋아했다. 그곳은 언덕 앞에 자그마한 못을 만들고 그 주위를 둘러 통나무 산책로를 지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걷는 산책로는 언덕을 따라서 올라가는데 꼭대기 즈음에 만들어진 작은 공터를 찍고 반 바퀴를 둘러 내려오는 식이었다.

 둘이서 온 사람들이 군데군데 세워진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들은 잠깐씩 빈 의자에 앉아 쉬다가도 이내 앞으로 치고 나가곤 했다. 멀찍이서 배달용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숨찬 이들의 호흡이 우리의 곁을 지날 때마다 나는 그들이 내딛는 발소리를 들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타박거리는 소리. 몸에 익은 걸음걸이로 그들은 정해진 길을 돌았다. 그들은 곁눈질하거나 옆으로 새지 않았다. 그들은 무던히 그 길을 돌고 또 돌았다.

 “삶이 꼭 외로운 것만은 아닐 거야.”

 “안 외로울 수 있을까?”

 “그러긴 어렵지 않을까? 내가 있어도 외롭다며.”

 나는 그녀를 보았다.

 “외로운 시간도 있지만 다른 시간도 있을 거야.”

 “지금 같은 때 말이지?”

 “당연하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만의 속도로 나름의 호흡과 걸음걸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나와서 정해진 걸음걸이로 정해진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은 자기의 삶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돌려받을 것 없는 삶을 그들은 무던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가 결혼해도 외로운 순간이 있겠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외로워서 사랑하면 안 된대.”

 하지만 외로움이 밀어내는 힘 없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빠져들 수 있을까. 나는 그 물음에 관한 대답을 구하고 싶었다. 온전히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삶을 우리가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랑의 순수한 모습은 대가를 바랄 수 없을 때에만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아무런 대가 없이 신을 사랑하는 일, 죽은 자식이나 부모를 그리워하는 일, 이유 없이 떠나간 연인을 홀로 그리는 일. 내 곁을 지켜준 산 사람과의 사랑은 결코 순수해질 수 없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나는 외로워서 사랑하는 것도 조금은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그녀에게 속마음을 고백했다.

 “괜찮아. 가끔 나도 그런 데 뭘.”

 그녀는 가로등 아래를 걷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연락할 수도 있지만 보고 싶어져서 연락할 수도 있는 거야.”

 “말 예쁘게 한다.”

 “여자의 언어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지?”

 공터를 지나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경사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뛰러 나오겠네.”

 “지금도 운동하고 있잖아.”

 “이상하지 않아? 둘러보면 젊은 사람들은 걷고 나이 든 사람들은 뛰어.”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흠칫거렸다.

 “생각도 못 했어.”

 “조금만 있으면 우리도 뛰어야 해.”

 “나는 오빠보다 젊어.”

 “그거 금방이래.”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편했다. 나는 익숙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녀도 익숙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제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삶을 이야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조금씩 누적된 그 대화가 어느새 비커를 흘러넘칠 정도가 되면 우리는 서로의 감정이나 생각을 알아맞힐 수준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하나의 이야기는 언젠가 나올 새로운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었고 그것은 전까지 가지고 있던 우리의 편견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우리의 세계는 그렇게 조금씩 접촉점을 늘려가며 헐겁게 엮은 하나의 넓은 보자기를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이 늘었고 새로이 담길 것들도 생겨났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고만 있었다.

 “못 한 바퀴 돌고 가자.”

 수면을 향해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의 줄기가 발처럼 산책로를 가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 걸으며 우리는 이따금 멈춰 사진을 찍었고 서로의 옷차림을 놀렸다.

 “약속 하나 해.”

 그녀가 나를 보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의 곁에 남아주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직장을 잃어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당연하지.”

 나는 대답했다.

 “내가 몸이 아파서 평생을 누워지내야 해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당, 당연하지.”

 나는 대답했다. 아무튼 대답했다.

 “내가 술을 마시고 교통사고를 내 사람을 쳐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당연하지.”

 나는 쉽게 대답했다.

 “내가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당...연하지.”

 나는 어렵게 대답했다.

 “또 뭐가 있을까.”

 “그만하면 안 될까.”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차로 향했다. 에어컨을 켠 채 그녀가 밖에서 땀을 식힐 동안 나는 트렁크를 열고 신발을 갈아신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려는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대답 안 했잖아.”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이건 대가 없이 들을 수 있는 거야?”

 “아.”

 그녀가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지적이야. 이 질문에도 대답하지 말아야겠군.”

 밖을 보며 웃는 그녀의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나는 대답을 듣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는 또 헤어지기 위해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혼자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에 떠오를 그녀의 메시지가 기다려졌다. 잠들고 깨어나도 여전히 우리는 함께일 것이다. 사랑하는 동안 내 삶은 어제와 오늘이 이어져 있었다.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기에 걱정스럽지 않았다. 안개에 가린 많은 일들이 내게는 겪어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불행한 사람도 붙잡아 주었다. 그것은 내게 고통스러운 시간도 가져다줄 것이다. 그게 사랑의 대가임을 알았다. 사랑은 목적과 의미를 주는 동시에 견딤의 시간도 요구할 것이다. 아직 힘든 일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사랑은 대가 없이 다가오지 않았다. 언젠가 나도 마땅한 값을 치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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