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시인,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흙은 무엇일까요. 상징적인 표현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지금 내 발에 밟히는 이 축축하고 부스럭거리며 다소간 탄력있게 꾹꾹 눌리는 그것일까요. 상징이라면 근원이나 전통, 유년기, 과거, 추억이나 관습이 떠오르고 실체라면 골목이나 운동장, 개발도상국 시절 한국과 농촌이 떠오릅니다. 상징적인 표현도 감각을 잃지는 않습니다. 흙들이라고 썼다는 게 상징적인 표현이라는데 조금 더 무게를 실어주는 듯 하네요. 흙이 아니라 바람이나 구름이라고 생각해보면 흙이 가져다주는 향토성과 뿌리, 전통과 같은 의미들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흙을 밟아보며 시를 읽어도 좋겠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시어가 힘을 잃습니다. 이제는 전화버튼 모양이 수화기 모양인 걸 어린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지요. 저는 어릴 적 상주에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담벽 너머로 논밭이 이어진 풍경이 자연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려면 차도가 있는 돌아가는 길과 격자 모양 논두렁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제 선택은 논두렁이었습니다. 혼자서 걷던 그 길 끝에는 염통꼬치 포장마차와 태권도 학원, 손목 들어올리라며 자로 툭툭 치던 피아노학원(결국 중간에 그만뒀습니다!), 드라이어스 악의 제왕을 팔던 문구점이 있었습니다.
발이 가진 기억을 우리는 잊고 삽니다. 손이 감각의 중심이 되고,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한 후로는 눈이 감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발은 다양한 장소와 폭넓은 감정, 때로는 가난도 기억합니다. 그러니 내 발에 물어볼만 합니다. 따가운 햇살 아래 길이 촉촉할 수 있다는 건 밟아보면 압니다. 물 속의 자갈이 아랫목처럼 뜨근하게 익어있다는 걸 밟아보면 압니다. 저도 모르는 도깨비불, 수국이 어떻게 생긴 꽃인지 모르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단어처럼 보이는 딴딴한 장딴지. 아버지의 힘센 팔뚝 같은 단어는 우리 시대에 사장된 단어처럼 보입니다. 저녁연기라니요. 굴뚝이라니요.
다 어디로 갔을까요. 사건에는 시간이 붙는데 시간에는 사건이 따라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감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을 과거로 돌려놓는 건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묻는 분명한 물음입니다. 아름답다거나 그립다거나 따뜻했다거나가 아니라, 그 끝에 선 감각의 빈곤입니다. 시인에게는 지금 흙이 없고, 촉촉한 마당과 길이 없고, 따갑게 익던 자갈과 굴러다니던 도깨비불,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 돌아다니던 동네 어른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감각과 정감, 기억들과 멀리 떨어져 어린 나의 행방을 묻지만, 사실 분명한 건 과거의 감각들이며 오히려 불분명한 건 지금 내 감각과 감정과 행동입니다. 이 시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보다 현재의 상실을 이야기합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지나간 것들은 되려 분명해지고 지금 나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지금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조차도 알기 어렵습니다.
아무도 모른다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내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시인, 창비, 2006년